2월, 2024의 게시물 표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최바 * 중심의 인터 * 과연 성경적인가 ?   인터 * 의 기본 의사결정 구조와 실제 결정 구조에는 본부장 최바 * 에 대한 견제장치가 없다 . 이는 공동체 다수의 지지를 받느냐 아니냐 와는 별개의 개념이다 . 현재 인터 * 에는 최바 * 이 핵심정보를 독점하며 최종 결정을 할 때 그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라는 철의 법칙에 최바*은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는 부패할수 밖에 없는 구조에 스스로 만든 논리에 갇혀 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인터* 구성원들이 고통속에 있다. 이 고통은 비단 내부 구성원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새롭게 동원되는 모든 이들을 포함한다. 이렇게 인터 * 의 구조가 최바 * 중심의 1 인 권력구조로 개편된 것은 첫번째 최바 * 개인의 성격에서 기인했다 . 두번째는 빠른 성장과 위기의식을 지속적으로 주입하며 1 인중심의 권력구조를 정당화했으며 마지막으로 인터 * 구성원들이 이 구조가 성경적이며 지금 인터 * 의 성과를 이룬 이유라고 생각하도록 지속적으로 세뇌한 결과이다 .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점점 강화되어 최바 * 에 반대하는 사람을 인터 * 에게 반대하는 반역자로 탄압하곤 하며 , 이를 위해 최바 * 은 인터 * 의 질서를 자신에게 집중시킨 뒤 , 초법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인터 * 에 군림하게 되었다 . 그래서 최바 * 은 인터 * 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 그리고 이 강박관념으로 자신의 의지와 사상을 가장 잘 전수하고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들 , 딸이라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   어느 순간 인터 * 의 구성원들은 최바 * 이 존재하지 않는 인터 * 을 생각도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고 , 그래서 인터 * 에 소속된 공동체 대다수는 인터 * 을 혼란케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최바 * 을 옹호하게 된다 . 이 때문에 인터 * 에서는 최바 * 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서 받아들여진다 .   그러나 사실은 최바

교회 세습에 대한 구약학적 고찰

교회 세습에 대한 구약학적 고찰 전성민 교수의 글 요약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 구약학,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   1. 세습의 의미 세습은 “부와 권력 혹은 영향력이 혈연으로 엮어진 선후대 사이의 이전(移轉)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따라서 “세습”이라는 표현이 정당한지 아닌지의 문제는 그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특권의 이양”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지 여부와 직결될 것이다. “세습”이라는 표현은 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 부모에서 자녀로 담임목사직이 이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담임목사라는 직분의 세습 뿐 아니라 “교회 세습”이라고 까지 불릴 만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세습이라는 표현은 어떤 권리의 이양을 말하는 것이며 교회는 그렇게 이양되는 권리가 아니라고 그래서 “교회 세습”이라는 표현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미 한국 교회의 몇몇 경우들은 교회가 대를 이어 이양될 수 있는 특권의 총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경우 “세습” 또는 “교회 세습”이라고 까지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세습의 원인 (1) 한국 사회의 혈연주의와 (2) 한국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로 요약될 수 있다.   1) 혈연주의에 대한 구약의 통찰 세습이 혈연주의 때문이라는 설명은 여러 통로를 통해 지적되어왔다. 기독교는 혈연이 아니라 언약의 종교임을 천명했다. 이정석 교수도 “아들이 아버지의 가장 적절한 후계자라는 사고는 의심의 여지없이 혈연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시대에는 아론의 제사장직이 세습되었으며, 다윗의 왕직도 세습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혈족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죄되었고, 진정한 이스라엘은 육적 후손이 아니라 영적 후손임을 바울이 분명히 하였다.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적 측면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혈족의 의미를 무시하였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교회 세습에 대한 신약학적 고찰

 교회 세습에 대한 신약학적 고찰 - 신약성서에서 바라본 한국 교회의 세습 문제 - 요약 김판임 교수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신약학)   들어가며 세습이란 봉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아들이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봉건사회에서는 아들이 아버지가 하는 일을 이어가는 것을 가업을 잇는 훌륭한 행위로 인정하였다. 물론 가업을 잇는 책임을 맏아들에게만 있고, 다른 아들은 자유로웠다. 종교 영역에서 세습의 형태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대제사장과 제사장, 레위인의 가문에서 나타났다. 가톨릭교회는 사제에게 결혼을 허가하지 않으므로 교회권력의 세습의 문제는 개신교회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일이라 하겠다. 과연 성서는 교회 세습에 관해 어떤 판단을 내려줄까? 예수님은 한국 교회의 세습을 바라 보실 때 잘했다 칭찬하실까? 교회 개척에 열심이었던 바울은 현재 한국 교회의 세습 상황을 보고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진다. 신약성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현재 교회의 조직과 같은 것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목사라는 직책도 없었을 것이므로, 교회에 대한 기본 개념, “교회 지도자” 혹은 “후임자” 등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신약성서에서 세습을 정당화할만한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고자 하며, 그렇지 않다면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회 세습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과 교회 지도자 후임자 선정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신약성서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 1) 예수의 교회와 지도자 이해 예수가 지상에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시며 외친 말씀은 “때가 찾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것이었다. 하나님나라의 시작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 마가복음 1장 17절에 의하면, 예수가 지상에서 활동하셨을 때 “나를 따르라”고 하며 제자를 부르셨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을 하셨으리라.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외에

교회 세습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

 교회 세습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 - 성직 세습, 그 마지막 유혹 - 요약 유경동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1. 들어가는 말: 양날의 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에 의한 기독교의 공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이전에는 “어떻게 순교해야 하는가?”라는 신앙적 질문이 이 세상에서의 기독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최종적인 질문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세속 사회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야 하는가?”가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 그리고 임박한 천국에 대한 소망은 불가피하게 교회 공동체의 제도화를 이루게 되었으며, ‘저 하늘이 아닌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은 세속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심판은 ‘이미(already)’와 ‘아직(yet)’ 사이에서 ‘어정쩡한 윤리(quandary ethics)’가 되었으며, 시대적 조건 속에서 지혜를 짜내어 최소한의 악으로 최선을 기대하는 ‘근사치 정의’의 현실주의나 공리주의 윤리를 제시하는 데에 그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재 윤리적 주소이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잊어버리고 세상에서 표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가 증대되면 오히려 종교의 내용이 감소하고 세속적 애착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사회가 제공하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사회의 악을 고발하기 보자는 내면적 죄의 문제에 그 영향력이 제한되며 교회는 사회로부터 점점 고립되어간다. 부와 연관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많은 징후들이 있겠지만, 이 글에서 다루려는 ‘성직 세습’(이하 세습)은 현대 자본주의의 ‘소유’와 연관된 전형적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쟁점화 되었던 세습은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각각 도덕적, 신학적, 그리고 공적 영역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본다. 세습에 관한 지금까지의 글들은 대부분의 도덕적 관점에서의 비판으로서 주로 교회의 경제적 요소(규모와 재정)에

인터*의 존재 이유는 열방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것이다.

  인터*이 열방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는 공공적 책임성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전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터*이 열방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인터*이 상식적인 기준과 합리성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타락한 단체가 된다면 빛과 소금은 커녕 인터*안에 빛과 소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것이다.   인터*은 세상의 부조리에 더 이상 편승하지 않고 오히려 부조리한 질서를 변화시켜야 한다.  인터*의 존재 이유는 천국복음을 선포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를 만드는것에 있다. 열방에 하나님나라의 공의와 사랑을 선포하며 제시해야 할 인터*이 한국사회로부터 사망선고를 진단받지 않도록 인터*의 갱신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인터*은 선교 성장이 중요한 가치가 되면서 그것을 가로 막는 모든 것이 다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된 되었다. 지금도 인터*이 크고 성장하고 있으니 성경적이지 않은 모든 제도와 시스템에 대해서 암묵적 묵인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터*안에 대화와 소통과 건전한 비판을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 것들이 성장에 도움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극한 집단이기주의 가운데 인터*의 양적 증가에 집중하며, 건물 올리는 것이 가장 선한 것으로 치부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터*의 성장에 기본이 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세미나에 사람들을 동원하는것에 모든 힘이 집중된다. 이것이 인터*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프로그램의 중심엔 최바*이 있었고, 최바*스스로 인터* 성장의 모든 이유는 스스로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이 능력이 자녀에게 유전된다는 독특한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내부 맴버들은 지금까지 인터* 성장이라는 대의앞에 그 내용이 성경적인지 예수님의 방법인지에 대한 질문과 고민보다는 결과가 좋으면 방법은 옳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끝은 인터*은 최바*의 것이고, 최바*의 가족만을 위한 것이라는 결과에

인터*에 퍼진 모든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

인터 * 에 퍼진 모든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 .   인터 * 은 일반적인 지역교회와 다릅니다 . 일반적인 지역교회의 성도들은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닌 대부분 단순 참가자들입니다 . 그래서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사유화와 세습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 방관자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안에 광범위하게 사유화와 세습이 진행될 수 있었는데 이는 바로 방관자로 있는 성도들의 심리 이용해서 많은 대형교회들은 부끄럼도 없이 버젓이 사유화와 세습과 같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인터 * 의 구성원은 모두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주인의식의 기본은 첫째 이 공동체가 비록 완전하진 않지만 거룩하고 성결하며 주님의 뜻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공동체라는 확신입니다 . 두번째는 구성원이 인터 * 에 방관자나 참가자가 아닌 공동체 구성원임을 결정할 때는 자신도 옳은것을 추구하기에 이 공동체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결단입니다 . 그래서 지금도 많은 간사님들과 총무님들과 선교사지망생들은 이 공동체가 옳다는 확신이 있기에 인터 * 에서 훈련받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길 원하는 것입니다 .   인터 * 은 청년들이 시작한 단체입니다 . 청년들은 옳은 것을 추구하고 선택합니다 . 그래서 청년들이 역사를 바꾸어 갔습니다 .   만약 인터 * 에 세습과 사유화가 한국교회의 대세와 함께 그대로 진행된다면 더 이상 인터 * 엔 옳은것을 따르고 옳은것을 행하기 원하는 진짜 청년들은 오지 않을 것이며 , 인터 * 안에 옳은 것을 추구하는 구성원들은 마틴루터가 했던 것처럼 불의함에 저항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   착각하지 마십시오 ! 한국교회 가운데 전반적으로 퍼진 세습과 사유화의 흐름이 인터 * 의 세습과 사유화도 용납되고 용인 될것이라는 정치적인 계산 , 기존 인터 * 구성원들이 최바 * 의 세뇌와 공포와 강압으로 맹목적으로 불의조차도 따를

마키아벨리의 제자 vs 예수님의 제자

 마키아벨리의 제자 vs 예수님의 제자 1. 리더십의 성격: 마키아벨리: 실용적이고 무자비한 리더십을 옹호하며, 필요한 경우 거짓, 속임수, 조작, 협박 등 필요한 모든 수단을 통해 권력을 잡고 공동체의 통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마키아벨리는 “리더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포와 강압을 통해 공동체를 다스릴것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 섬기는 리더십, 겸손, 타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는 진정한 위대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며 자신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데서 나온다고 가르쳤습니다. 2. 도덕성과 윤리: 마키아벨리: 지도자들은 전통적인 도덕적 가치보다 공동체의 안정과 번영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는 유명한 글을 썼는데, 이는 부도덕한 행동이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진다면 모든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 긍휼, 용서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은 윤리적 원칙을 준수하는 것을 가르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함을 가르쳤습니다. 목적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도 거룩하고 성결함을 요구합니다. 3. 삶. 인간성: 마키아벨리: 인간의 본성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며 권력과 두려움에 쉽게 흔들리는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통치자들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경향을 이해하고 조작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신뢰하지 않고 철저히 필요에 따라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회개, 용서, 거듭남과 같은 복음으로 인한 완전한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회개를 통해 변화된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도록 강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자의 인격성과 특징을 유지하도록 하며 동시에 인간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인 죄에서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4. 폭력 사용: 마키아벨리:

교회 지도자의 무거운 죄에 대한 대응책: 성경신학적 고찰

  교회 지도자의 무거운 죄에 대한 대응책: 성경신학적 고찰* 김진규 백석대학교 부교수, 구약학   I. 서론과 현재의 이슈들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외적으로 이단의 도전 앞에 놓여 있고, 내적으로는 교회 지도자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있다. 신천지와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의 사회적 교회적 도전과 해악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은 회개치 않는 지도자들의 죄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발표한 “2013년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교회가 현재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한다. 이 조사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사회봉사활동을 적극 수행하는 종교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는 기독교가 41.3%로서 단연 1위이다. 가톨릭이 32.1%로 2위이고, 불교가 6.8%로 많이 뒤쳐진 3위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들 종교에 대한 신뢰도 조사결과는 가톨릭이 29.2%로 1위이고, 불교가 28.0%로 2위이고, 개신교는 21.3%로서 꼴찌이다. 기윤실이 2010년에 행한 조사결과도 비슷하다. 사회봉사활동을 적극 수행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42.1%로 1위이고, 가톨릭이 39.3%로 바짝 뒤를 쫓아 2위이고, 불교는 10.6%로서 한참 처진 3위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종교 신뢰도는 가톨릭이 41.1%로 1위이고, 불교는 33.5%로 2위이고, 기독교는 20.0%로서 역시 뒤쳐진 3위에 머물고 있다. 사회봉사활동과 종교 신뢰도가 이렇게 반대로 나타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사회봉사활동은 단연 앞서고 있는데, 왜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을까? 무엇이 기독교를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종교로 만들어 버렸을까? 이는 손봉호 박사가 늘 강조해왔듯이 기독교의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필자가 최근 발표한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 고난의 현주소”라는 논문에서 기독교의 신뢰도를 무너뜨리는 4가지 심각한 요인들을 다루었다. 이들 요인들은 교회세습 문제, 성추행의

인터*안에 사역자들의 인격 파괴 현상은 잘못된것입니다.

인터*과 본부장의 특징,  목적을 위해 최바* 가족을 제외한 모두는 사실 도구화시킬뿐이다.  인터*은 구성원 특징과 성향을 억누르고 그 관심을 철저히 인터* 공동체의 목표에 집중시켜야 하므로, 끊임없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며, 이를 따라오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구성원은 배척, 배제된다. 또한 내부 인터*은 공동체'에서 타 공동체로의 떠나거나 다른 기독교 공동체로부터의 인터*과 다른 성경적 가르침의 유입이 일어날 경우 분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타 공동체에 대해 굉장히 배타적인 성격을 띤다. 이 결과,  인터* 이념의 재확인 및 타 공동체에 대한 배타적 태도의 결과물로 다른 선교 기독 공동체에 대한 비판과 우월의식이 일어나게 된다. 지속적으로 인터*의 활동은 모두 공동체의 통합성과 우월감을 표출하기 위한 것이므로, 자신의 이념과 우월성을 계속해서 선전하고 선동하고 다니는 특성도 보인다. 이렇게 하나의 공동체를 하나의 통일적 이념으로 휘어잡고 개인의 특징을 억누르고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매진해야 하므로, 인터* 통합과 어긋나는 '개성'이나 '창의성'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인터*의 가장 큰 장점은 힘의 결집이다. 인터*은 지도자의 판단대로 다수를 하나로 묶어 이들의 힘을 쉽게 모을 수 있고, 목표에 방해되는 개인의 불필요한 행동도 억제할 수 있다. 따라서 지도자가 올바른 방향성을 잡는다면 단기간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할 수 있는 건 물론, 장기적으로도 몇십 년이고 안정적으로 시행할 수 있다는 장점 또한 있다. 공동체 내부의 단결력과 정신적 통일성, 외부 집단의 배척 면에서 인터*이 큰 힘을 발휘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인터*은 공동체의 비전을 위해 개인의 인간성과 사생활을 비롯한 모든것에  희생과 순종(복종)만을 강조하고, 극도로 수직적이다. 결국 인터* 장기적 역량을 축적할 수 없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인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본부장에 대한 맹목적 추앙으로 연결된다. 인터*에서는 힘의

인터* 권력의 독점화와 절대 권력의 부패

인터*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인터*내 권력의 독점화 때문입니다. 절대 권력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왕을 요구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우려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4-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주변국들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사사를 세워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당시 주변국들은 왕정국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군사가 있었고 이들을 이끌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인 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왕만 있다면 블레셋과 같은 이방인들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잘 보호해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문제있을 때마다 사사를 세워 자신들을 의탁하기보다는 항상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장로들이 찾아가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왕을 세우는 것은 모든 인생의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사로운 권력자를 세우겠다는 것임을 상기시키며 이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가로채는 자들로 간주하십니다. 세상의 왕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침탈당한 이 후에 한동안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몇 대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 왕들은 궁을 짓는데 사람을 동원하고 허리가 휘도록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아무것도 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