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세습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
교회 세습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
- 성직 세습, 그 마지막 유혹 - 요약
유경동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1. 들어가는 말: 양날의 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에 의한 기독교의 공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이전에는 “어떻게 순교해야 하는가?”라는 신앙적 질문이 이 세상에서의 기독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최종적인 질문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세속 사회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야 하는가?”가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 그리고 임박한 천국에 대한 소망은 불가피하게 교회 공동체의 제도화를 이루게 되었으며, ‘저 하늘이 아닌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은 세속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심판은 ‘이미(already)’와 ‘아직(yet)’ 사이에서 ‘어정쩡한 윤리(quandary ethics)’가 되었으며, 시대적 조건 속에서 지혜를 짜내어 최소한의 악으로 최선을 기대하는 ‘근사치 정의’의 현실주의나 공리주의 윤리를 제시하는 데에 그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재 윤리적 주소이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잊어버리고 세상에서 표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가 증대되면 오히려 종교의 내용이 감소하고 세속적 애착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사회가 제공하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사회의 악을 고발하기 보자는 내면적 죄의 문제에 그 영향력이 제한되며 교회는 사회로부터 점점 고립되어간다.
부와 연관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많은 징후들이 있겠지만, 이 글에서 다루려는 ‘성직 세습’(이하 세습)은 현대 자본주의의 ‘소유’와 연관된 전형적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쟁점화 되었던 세습은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각각 도덕적, 신학적, 그리고 공적 영역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본다. 세습에 관한 지금까지의 글들은 대부분의 도덕적 관점에서의 비판으로서 주로 교회의 경제적 요소(규모와 재정)에 대한 목회자의 교회 사유화를 비판하는 입장이며, 소수의 신학적 관점은 신약과 구약 성경에서 성직매매(simony)를 유형별로 비판하고, 세습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공공성의 관점은 교회의 세습화 과정에 나타나는 나름의 합리성에 의문을 가지고 사회적 영역에서의 교회의 책임을 묻는 입장다.
필자는 세습에 관한 이와 같은 논의들이 한국 개신교 내에서 공론화의 과정에 있다고 보며,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규범을 초월하는 개신교의 가치가 한국 사회를 선도하여야 한다고 본다.
2. 권력인가? 권위인가?
세습의 문제에서 부각되는 주요 비판은 교회의 목회자에게 주어진다. 최근 감리교는 <교리와 장정> 제3편 ‘조직과 행정법’에 ‘담임자 파송 제한’ 조항을 신설했다. 이 조항은 ‘부모가 담임자로 있는 교회에 그의 자녀 또는 자녀의 배우자는 연속해서 동일교회의 담임자로 파송할 수 없다’와 함께 ‘부모가 장로로 있는 교회에 그의 자녀 또는 자녀의 배우자는 담임자로 파송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목회자가 교회의 행정 책임자로서 후임자 문제를 교단의 법에 따라서 적법하게 치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리교가 이와 같은 조항을 신설하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본다. 첫째, 목회에 근본적으로 혈연적 관계의 개입을 차단함으로서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둘째, 담임자의 후임자에 대한 영향력(권력)을 제한함으로서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그리고 셋째, 세습 문제로 야기된 대 사회적 신뢰성의 회복을 위하여 교회의 정의로운 기준을 제시한 것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목회자의 영적 권위가 교회행정을 파행으로 처리하는 권력으로 비쳐지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이와 같은 감리교회의 노력은 매우 시기 적절한 조치이며 개신교 전체에 좋은 전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교회행정은 목회자의 권력이 아니라 영적인 권위로 수행되는 것이다. 권위는 상향적이지만, 권력은 하향적이다. 권위는 공동체의 자발적인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권력은 명령과 절대 복종을 필요로 한다. 세습에 있어서 당사자들은 세습의 근거로 성서(신적 권위)와 목사직(소명), 그리고 성도의 순종(종교적 합리성)에서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세습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본래적인 이와 같은 가치들은 곧 퇴색하고 만다.
교회의 권위는 목회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한마디로 성서의 권위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후 그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그 분의 말씀이 살아있는 ‘권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권위는 성서를 통한 해석이 아니라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한 생생한 삶의 사건이 없이는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정황을 고려하여 추상적으로 접근하여 이상적인 도덕을 그리는 그런 차원에서의 도덕이 아니라, 우리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죽음을 돌파하는 제자도를 통하여 성경의 진정한 권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습이 전적으로 권력적 모습으로 비치는 이유는 바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권위에 대한 공동체적 사건과 제자도의 삶이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로 세습을 원하는 공동체와 목회자, 그리고 자녀도 교회의 일부를 구성하고 나름 합리성을 가진다. 세습의 절차에 필요한 회의를 거치며, 위임의 형식을 통하여 교회의 장래를 염려하는 과정에서 세습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공동체의 거룩한 권위가 아니라, 교회를 좌우하는 목회자의 권력으로 비쳐지는 데에 있다.
기독교의 진정한 권위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의 생생한 체험을 통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목회를 통한 목회자의 헌신과 교회를 염려하여 자녀에게 세습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권위가 아니다. 세습을 주장하는 독선이 앞서기에 권력의 충돌과 알력, 그리고 교회가 분열되는 파행이 거듭하게 된다.
목회는 육체적 DNA로 형성되지 않는다. 목회의 권위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있으며, 모든 목회자는 거룩하게 부름 받은 종일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연에 의하지 않고, 소명에 의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자(父子)의 관계를 통하여 계승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통하여 완성된다. 부르심과 순종 외에는 목회를 구성하지 않는다.
3. 정통성인가? 정당성인가?
개신교의 세습에 나타나는 규범적 논의는 윤리적인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다. 세습은 형식적으로는 교회의 자유에 속하면서도 다른 한편 이러한 종교적 행위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냉소적인 이유는 바로 종교의 규범이 사회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세금의 논쟁에서도 비쳐지는 기독교의 모습처럼 세습도 교회의 사회적 정당성과 정통성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세습과 연관하여 사회적인 여론이 들끓을 때 세습이 이루어진 교회는 절차상의 합법성을 강조하게 된다. 세습을 이루기 위하여 일련의 교회 내 절차를 거쳤기에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합리적 정통성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가 속한 교단의 법을 통한 행정적 절차를 거쳤기에 적법하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회와 사회의 질타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사회 속에서 교회가 보존하여야 할 자기 정체성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즉 사회통합의 차원에서나 교회의 종교적 가치 보전에서 그 절차적 정통성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교회가 사회적 동의를 늘 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교회는 다르다”고 인식하는 그 내면에는 교회란 적어도 사회가 이룩할 수 없는 초월적 정신세계의 실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국 사회 내 걸핏하면 일어나는 기업의 부패에 대한 소비자의 의식은 매우 냉정하다. 기업의 투명성이란 기업의 실질적 소유자나 주주, 사원, 채권자, 그리고 시장 등 모든 관계자들에게 기업의 모든 유용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는 데에 있다. 기업 경영에 있어서 이윤을 극대화 하려는 경영자에 대한 감시는 국가적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소비자와 투자자들에 의하여서도 수행된다. 따라서 기업부패방지법을 통한 기업의 윤리적 거버넌스에 대한 요청이 점점 거세게 요구되는 것이다.
정치적 통합의 가장 높은 단계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규범적 조화를 전제로 한다. 입법과 사법, 그리고 행정의 3권 분립을 통한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권력의 분산을 통하여 모든 성원의 자유와 평등을 이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 백성의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다. 비록 세상이 성도들의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여 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 내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자로 인정받고 저 높은 뜻을 가지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에서도 경제 조직체에 대한 윤리적 요구가 이렇게 높을진대, 영적 영역의 교회에 요구되는 도덕성을 재삼 강조할 필요가 있겠는가? 세습을 이룬 교회의 절차적 정통성에 있어서 문제는 여전히 교회의 의사기구가 담임자의 정치적 역할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것이다. 교회도 제도인 이상 일종의 정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적 영역은 엄연히 구별된다. 종교란 인간의 절망에 희망을 주는 거룩한 상상력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통하여 그 가치가 보존된다. 정치란 제한된 현실을 극복하려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발현된 행위이지만, 자유와 평등이 전제되지 않는 한, 사회적 통합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세습의 경우 사회적 지탄이 되는 이유는 ‘도덕적 정당성’과 사회통합과 보전이라는 ‘규범적 요청’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즉 세습의 절차적 합리성을 강조하는 과정에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구원사건은 목회자의 정치 정략적인 권력화로 축소된다는 인상을 주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과 보편적 사랑은 세습을 이루려는 목회자의 개인적 판단과 가족의 영역에 제한되고 만다. 고난을 통한 십자가의 희생은 세습에 따른 교회 내 또는 사회적 비난에 대한 감수로 대체되고, 부활의 영광은 자녀를 통한 교회의 성장논리로 바뀌게 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아니라, 한 목회자의 가족사로 변질되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가 아니라, 목회자의 추종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과의 갈등으로 바뀌고, 교회 건물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목회자의 사유지로 바뀌는 이미지변질을 가져온다.
또한 세습은 아버지 목회자의 정신적 영역이 아니라 교회의 건물을 통하여 소유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더 정당성이 없다. 목회가 경제의 논리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강조한다 할지라도, 현재 개신교 약 80퍼센트의 교회와 목회자가 면세점이하의 생활을 한다고 할 때, 세습이 주로 교단의 지도자들이 담임하는 대형교회에서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순수한 목회의 계승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를 세습함으로서 목회자간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화되며, 목회자간 경제적 차별이 지속되는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4. 소명인가 직업인가?
위에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세습의 문제는 자칫 목회자의 권위와 정당성이 아닌, 권력과 자기중심의 비합리적 행위로 비쳐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목회자의 소명은 전적으로 개인의 명예와 생존을 위한 경제적 행위로 비쳐지게 된다. 개신교의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영혼 구원을 위한 성직자의 모습은 세습을 통하여 경제적 행위와 보상을 전제로 한, 경제적 보상이 있어야만 가능한 직업인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도 삶에 필요한 의식주가 필요하다. 그러나 소명은 그 의식주의 영역을 뛰어넘어 희생을 필요로 하는 정신적 영역이기 때문에, ‘소유’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세습에 있어서 종종 신약의 직임자들이나 구약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언급이 된다. 신약성경에서 세습의 유형을 발견할 수 없다. 교회의 거룩한 직임을 맡은 사람들 중에 감독이나 집사(행 1:12-26, 딤전 3:1-13)의 조건에 혈연의 내용은 없다. 구약의 레위인들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들의 몫으로 삼아야 하는 사람들로서 권력과 소유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땅을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대신 백성들의 십일조를 통하여 생활하였다(민 18:20, 24). 비록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성전예배를 담당하고 혈연적인 세습의 형태를 띠지만, 세속권력이나 부의 축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목회자에게 무소유를 강제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은 신앙의 자유에서 발현되는 부르심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도 이러한 점들에 대하여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루터(Martin Luther)는 만인사제설을 통하여 모든 크리스천은 사제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강조한 것은 자기 스스로 사제가 되어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다른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부탁하신 것들을 서로 가르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즉, 만인 사제설의 본래 뜻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루터는 사제가 결혼을 하면 가난한 목회로 말미암아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부담이 생기게 되고 양심에 반하는 일들이 생길 수 있지만, 결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이해하였기에 독신을 반대하였다. 당시 로마교황이 결혼을 금하였지만, 결국 이는 사제들을 죄와 스캔들로 빠져들게 할 것이라고 그는 경고하였다. 결혼의 목적은 신앙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 결혼하는 것이나 하지 않는 것이나 신앙의 자유이지 강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루터는 강조하였다. 루터가 결혼과 연관하여 직접 세습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사제들에게 주어지는 재정적 지원이 사제의 목적이 되면 모든 사람이 사제가 되려고 할 것이며, 심지어 자신의 자녀들도 사제가 되도록 부추기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렇게 되면 이마에 땀을 흘리는 수고나 고생 없이 사제직이 세속적 부양을 얻게 되는 직업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을 그는 강조하였다.
칼빈(John Calvin)도 사제직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린바 있다. 사제직이란 누구를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교황에 위임된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진정한 대제사장의 직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리인이나 후계자 없이 성직을 감당하셨다. 따라서 사제직이란 교리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대속과 그분의 하나님에 대한 간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칼빈은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그 어떤 종교적 직분을 가지고 계시지 아니하셨고, 예루살렘에서 죽으심으로 그의 사명을 완수하셨음을 상기시킨다. 마치 모세가 그의 사명을 궁전이 아니라 광야에서 마감한 것처럼, 사제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헌신과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소명인 것이다.
진정한 사제가 되는 것은 아론(Aron)의 인간적인 제사장의 외양적인 옷이나 제도를 통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강조한 루터의 지적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그는 목회란 바울의 경우처럼 오로지 믿음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였고, 하나님이 명하신 멜기세덱의 반차(히 7:17)를 따라가는 영적인 직무임을 재차 강조하였다. 칼빈이 지적한 목회자의 순전한 사명을 우리는 상기하여야 한다. 목회는 죽음으로 마감하여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신앙의 정수가 아닌가?
세습이 이루어지는 곳에 죽음을 깨뜨리고 나아가는 개혁의 이상은 찾기 힘들 것이다. 혈연으로 이어지는 목회는 광야가 아니라 궁전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목회자 스스로가 이웃이 아닌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나아가는 세습의 통로에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잃게 된다. 성직은 믿음과 헌신, 그리고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소명이다. 성직자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주를 위하여 살며, 가족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산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가족보다도 더 크다. 목회자에게도 가족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가족은 하나님의 자녀인 구원공동체의 평등한 일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은 혈연이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다. 따라서 진정한 목회자는 자기와 가족을 위한 목회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먼저 염려하는 성직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5. 세습 그 마지막 유혹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는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과의 타협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였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위선’이라고 보았다. 역사 속에서 교회의 ‘위선’은 ‘교파나 교리분열’이라는 모습으로 위장하여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물론 진리에 대한 교리의 차이나 교파주의에 ‘개혁’의 내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교회 분열을 가장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자성과 진정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세습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노력은 최소한 세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첫째, 교회가 교회다워져야 한다. 현대 신학에서 중요시하는 서사적 관점은 성경의 구원 사건이 시공을 넘어 우리에게 전달되는 복음의 생명력을 강조한다. 성경 어디에도 ‘세습의 이야기’는 없다. 교회의 위기는 세습을 둘러싼 현대 교회의 이야기가 구원사건과 연관이 되지 못하는 점에 있다. 성경속의 진리에 나타나는 다양한 인물들의 희생과 사랑이 하나님의 진리를 둘러싼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것처럼, 현 시대 교회에서 회자되는 모든 이야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둘째, 교회는 전적으로 삼위일체를 통한 성령의 선물로 유지되어야 한다. 몰트만(J?rgen Moltmann)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본성을 가진 인간들이 추구하여야 할 최고의 가치인 ‘사회화’의 모델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삼위일체의 하나님도 세상 속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처럼 교회는 자신이 아니라 타자와 더불어, 타자를 위해, 타자의 현존 안에 있는 삶 속에서 하나님이 드러나야 한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도 하나님과 연관된 개념들 가운데 ‘절대주의(Absolutism)’, ‘전체주의(Totalitarianism)’, 그리고 ‘부계중심주의(Patriarchalism)’와 같은 것은 모두 다 전근대적인 군주적 개념들이라고 보았다. 보프는 삼위일체론은 영원히 홀로 있는 일자의 고독이 아니라 일치와 다양성, 곧 일치의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공동체를 ‘사회적 유비’로 발전시켜 삼위일체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재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꿈꿔온, 인간 공동체에 대하여 주목하라고 주장한다.
교회는 권력이 아닌 은사의 다양성에 의하여 유지된다. 성령의 약속에 의하여 주어지는 이 복음의 전적인 목적은 세상 각 영역 속에서 칭찬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회화는 정치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순전히 다양성과 연합 정신을 통한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유지된다. 따라서 교회는 성직의 갈등과 분열로 비쳐지는 전근대적인 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칭찬받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제도를 통하여 구현되는 정의로운 법은 사회의 법이나 제도보다 앞서야 한다. 사회의 법은 정의와 합목적성, 그리고 법적 안정성을 구성하기 위하여 나름 발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세속적 정치도 최선을 다하는 상황에서 기독교의 법과 규범은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여야 한다. 사회법의 수준을 넘어서는 종교법은 개 교단이나 교회의 아성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정의와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질서와 소통의 절차를 보여주어야 한다. 거기에는 편견이나 배타성이 있을 수 없으며 모두가 평등하며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로 부름 받은 소명만이 있을 뿐이다.
교회의 규범을 통하여 교회와 성직자는 무엇보다도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로 전념하며 권력이 아니라 권위에 의지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재화의 크기와 교회의 크기, 또는 목회자의 전권에 의한 조직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은 각 개인의 다양성과 연합이 최상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라고 할지라도 왜곡된 의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마음의 원하는 바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의 병에 시달린다. 세습하는 것도 자유이고 세습하지 않는 것도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거스틴(Augustine)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사는 것이 자신에게 좋은 선(good)이 된다는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생의 자랑인 자기만족의 유혹을 극복하고 하나님 안에서만 참 기쁨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본회퍼는 우리가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오로지 세상에서 버림을 받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정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께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버림받음을 절규하시지 아니하셨는가? 그리고 그전에 이미 제자들도 당신을 버리지 아니하였는가? 이때 유혹하는 마귀도 떠나는 것이다(참고, 마4:11). 세상에 버림받고 홀로 남았을 때 하나님만이 천사를 통하여 도우시는 것이다(눅22:42-44).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을 때 마귀도 유혹을 멈추었다! 홀로남아 버림받은 존재와 같이 되었을 때 사역이 완성되는 것이다!
옥중에서 본회퍼는 자신에게 나치에 협력하면 풀어주겠다는 꼬드김을 ‘최후의 유혹(Last Temptatio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죽음으로 나아갔다. 세습은 어쩌면 목회자의 마지막 유혹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만 기대하며 나아가는 구원의 마지막 걸림돌일 수 있다. 평생 목회를 통한 헌신과 희생을 이 땅의 대가로 보상받으려는 인간적인 생각, 교회의 장래에 대한 연민, 그리고 자신을 이어 교회에서 봉사하기를 바라는 자녀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세습,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똑 같이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유혹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신앙의 자유에 있지 않았던가? 이 자유는 모든 불의를 의심하며,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영적 에너지이다. 우리는 이 영적 에너지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는다!(If you die before you die, you will not die when you die!)” 기독교의 영성은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의 밀실로부터 엄습하는 이 세상의 세습과 같은 안주로부터 해방하는 길은 죽음을 넘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부활신앙만 의지함이 우리의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