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지도자의 무거운 죄에 대한 대응책: 성경신학적 고찰
교회 지도자의 무거운 죄에 대한 대응책:
성경신학적 고찰*
김진규
백석대학교 부교수, 구약학
I. 서론과 현재의 이슈들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외적으로 이단의 도전 앞에 놓여 있고, 내적으로는 교회 지도자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있다. 신천지와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의 사회적 교회적 도전과 해악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은 회개치 않는 지도자들의 죄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발표한 “2013년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교회가 현재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한다.
이 조사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사회봉사활동을 적극 수행하는 종교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는 기독교가 41.3%로서 단연 1위이다. 가톨릭이 32.1%로 2위이고, 불교가 6.8%로 많이 뒤쳐진 3위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들 종교에 대한 신뢰도 조사결과는 가톨릭이 29.2%로 1위이고, 불교가 28.0%로 2위이고, 개신교는 21.3%로서 꼴찌이다. 기윤실이 2010년에 행한 조사결과도 비슷하다. 사회봉사활동을 적극 수행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42.1%로 1위이고, 가톨릭이 39.3%로 바짝 뒤를 쫓아 2위이고, 불교는 10.6%로서 한참 처진 3위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종교 신뢰도는 가톨릭이 41.1%로 1위이고, 불교는 33.5%로 2위이고, 기독교는 20.0%로서 역시 뒤쳐진 3위에 머물고 있다.
사회봉사활동과 종교 신뢰도가 이렇게 반대로 나타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사회봉사활동은 단연 앞서고 있는데, 왜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을까? 무엇이 기독교를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종교로 만들어 버렸을까? 이는 손봉호 박사가 늘 강조해왔듯이 기독교의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필자가 최근 발표한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 고난의 현주소”라는 논문에서 기독교의 신뢰도를 무너뜨리는 4가지 심각한 요인들을 다루었다.
이들 요인들은 교회세습 문제, 성추행의 문제, 교회헌금 유용의 문제, 표절과 대필의 문제 등이다. 여기서는 이들 4가지 요인들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를 반복하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선행 연구를 토대로 현재의 이슈를 접근하려고 한다. 이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연구는 필자의 이전 논문을 참고하길 바란다.
이들 4가지 문제는 단순한 문제를 떠나 십계명을 다중으로 범하는 심각한 죄악들임을 이전 연구에서 결론적으로 지적한 바가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 죄악들은 한국교회의 신뢰를 잃게 만들었고, 한국교회가 세상 가운데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만들었고, 한국교회의 성장이 하락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었다.
더욱 더 사태를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죄악들에 대해 지도자들이 지적당했을 때, 그들이 대응하는 방식이다. 많은 경우에 죄를 인정하지 않거나, 아니면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붙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거나, 죄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다른 저의가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변명하면서 회개치 않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흔히 이런 문제를 당하게 되면 철칙처럼 등장하는 것이 부패한 정치가들이 주로 단골로 사용하는 ‘음모론’이다.
지도자의 이런 대응은 진정한 회개를 요원하게 만든다. 또한 설교로 교인들을 세뇌하는 것도 단골처럼 등장하는 메뉴이다. 지도자의 죄에 대해서 무조건 함구하도록 세뇌시킨다.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세뇌를 당했기 때문에 지도자에 대한 도전은 천
벌을 받을 죄이므로 이에 대해서 도전할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현재 많은 교인들의 생각이요 목회자들의 생각이다.
이런 때 단골로 등장하는 문구는 ‘교회가 맞지 않으면 조용히 떠나라.’라는 말이다. 과연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지도자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인가?
지도자에 대한 도전을 막기 위해서 자주 사용되는 2가지 성경은 1)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지휘관 250명이 모세와 아론에게 도전했다가 멸망당한 사건(민 16:1–35)과 2) 다윗이 사울 왕이 기름부음 받은 종이기에 손을 대지 않은 것(삼상 26:1–25)이 단골로 등장한다. 민수기 16:1–35에는 레위인 대표자들이 모세의 지도력과 아론의 제사장직을 도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이 모세나 아론의 범죄 때문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의 지도력과 아론의 제사장직에 대한 도전을 했기 때문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범죄했을 때, 이 본문으로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적용한 경우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성직 자체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은 이들의 죄만큼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오늘날 일부 과격한 성도들이 지도자에게 실망한 나머지 성직 자체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사무엘상 26:1–25에는 다윗이 십 황무지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이기 때문에 치지 않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윗은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9절)라고 말했다. 설교자들은 여기서 힌트를 얻어 ‘기름 부음 받은’ 주의 종을 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고 설교한다. 여기서 발전시켜서 주의 종이 무슨 죄를 짓던지 간에 절대로 목회자에게 도전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설교를 한다. 과연이런 뜻일까? 우선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다. 9절에 보면 이는 왕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10절에 보면 왕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는 곧 하나님께 속한 권한임을 다윗은 인정한다. 이는 왕의 죄를 지적하는 것과 아무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조금 더 읽어보면 다윗이 왜 잠자고 있던 사울 왕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왔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왕을 죽일의사가 없고, 단지 자신의 무죄함을 밝히고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가를 깨우치기 위해서였다(18–20절).결과적으로 다윗의 말을 듣고 사울은 자신이 범죄한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21절). 목회적 관점에서 이를 적용하자면 목회자의 죄가 있다고 해서 그를 물리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죄에 대해서 분명히 깨우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가르치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중요한 점은 성경 어디에도 지도자의 죄를 덮어버리도록 변호하는 성경구절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성경은 지도자의 무거운 죄에 대해서 반드시 처벌 혹은 교정한다는 사실을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밝히는 것이 본 소고의 일차적 목적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지도자가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살피면서 교회 지도자의 권징에 대한 성경신학적 원리들을 도출해서 교회 지도자의 무거운 죄에 대한 권징의 주체와 방안을제안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부패한 지도자들로 인하여 교회의 위신이 추락하고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된 것은 이들의 죄에 대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기에 본 연구는 꼭 필요하다고 본다.
II. 지도자의 죄가 왜 심각한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나병환자 격리 수용의 원리(레 13:1–46)는 죄의 파급효과에 대한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여기에 사용된 나병의 원문 “짜라아트”는 현대의 한센씨 병이라기보다 “전염성이 있는 피부병” (NIV; 2, 3, 9절 등) 혹은 “악성 피부병”(NEB; 2, 3, 8절 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피부병 환자를 격리 수용한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막이 있는 곳에 부정한 질병을 가진 사람이 함께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레 15:31). 또 피부병을 앓던 자가 치유되어서 정결케 되는 날에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린 것을 보면 이런 피부병과 죄를 연관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레 14:1–32).14) 전염성 있는 피부병 환자의 격리 수용의 원리는 당시 의술이 발달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전염병의 파급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숨어 있고, 동시에 죄의 파급효과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동체를 함께 병들게 만들어 공동체의 멸망을 자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레 15:31).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간음죄를 지은 자를 교회 공동체에서 내어 쫓도록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명령한 것은 맥을 같이한다(고전 5:1–6). 만약 개모와 간음한 자를 교회 공동체에 내버려두게 된다면 이런 죄악이 공동체에 펴져 교회를 함께 부패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누룩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풀게 만들 듯이 이런 죄를 방치하게 되면 교회공동체를 범죄의 소굴로 만들 수 있음을 밝히 말하고 있다(6절).
지도자의 범죄는 특별히 대표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교회공동체를 쉽게 병들게 만든다. 성추행을 한 목회자를 처벌하지 않고 그냥 두게 된다면 문제는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된다. 세상에서 성추행한 자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라. 어느 사단장이 성추행 혐의로 군검찰에 송치되어 갔다.
하물며 거룩한 공동체로 부름 받은 교회의 목회자가 성추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은커녕 거액의 전별금을 주어 내보낸다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도 기가 찰 노릇이다.
성추행의 파급효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자에 대한 교회나 교단차원의 처벌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야 죄의 파급효과를 방지할 수 있다. 교회 지도자들에 의한 표절과 대필의 문제가 심각한 이유도 표절과 대필을 행하면서 수반되는 죄의 파급효과 때문이다.
주로 이들은 사역에 바쁘기 때문에 똑똑한 부교역자들에게 자신의 논문을 대신 쓰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표절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규정하고 있듯이 제8, 9계명을 동시에 어기는 행위이고, 게다가 부정한 방법으로 경쟁하기 때문에 장사꾼이 부정한 저울과 되를 속이는 것과 같이 사회적 부정의를 낳는다(레 19:35–36; 신 25:13–15; 잠 11:1; 16:11; 20:10,23). 그리고 대필자에게 보답의 형식으로 금품이나 자리의 특혜를 베푼다면 이는 일종의 뇌물과 같은 불의와 부정을 성직세계에서 행하는 격이다. 그러므로 대필을 요청한 지도자는 대필한 사람들을 자기 죄에 끌어들여 함께 죄를 짓게 만들고 부정의를 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를 보고 배운 부교역자들을 또 다른 범죄로 유인할 수 있는 죄의 파급효과를 낳게 된다. 이는 곧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 그러니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범죄한 사람들을 그냥 방치하게 되면 하나님과 교회의 명예에 먹칠을 하기 때문에 교회의 권징의 필연성을 강조하였고, 권징의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첫째는 더럽고 수치스러운 삶을 사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서 하나님의 존귀를 가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참조. 엡 5:25–26)가 마치 사악하고 파렴치한 사람들의 집단인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므로(골 1:24) 그런 더럽고 추한 지체들로 인하여 부패하게 되면 그 머리에게 치욕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그 지극한 신성한 이름을 치욕으로 씌우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사악하여 그리스도인의 이름에 치욕을 돌리는 자들을 그 권속으로부터 제거시켜야 하는 것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교회세습이란 말은 한국교회에서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1997년 한국의 보수주의 대표격인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가 교회세습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대형교회들이 그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김창인 목사는 임종 전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를 했지만 그의회개는 너무 때늦었다.
한국의 많은 대형교회들이 이미 그의 전례를 따라가 버렸고, 세상 속에서 한국교회가 함께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그만큼 사회 속에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당하게 된 것은 죄의 파급효과를 미리 아시고 경고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민 33:55; 수 23:13). 하나님께서 죄의 파급효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가나안 7족속을 완전히 진멸하도록 명령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신 20:16–18).
특히 포로기 이전에는 죄에 대한 집단적 책임을 묻는 경우가 있었다.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공동체 전체가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죄의 공동체적 책임을 묻는 대표적인 경우는 아마 아담과 하와의 범죄일 것이다.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은 모두 원죄를 지닌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또 하나 대표적인 예로 아간의 범죄이다. 그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수 7:1–26). 다윗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인구조사를 했다가 무고한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삼하 24:15). 특히 이스라엘 왕들의 범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를 함께 죄악으로 몰고 가는 파급효과가 컸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왕상 16:2, 3, 7, 19, 26, 31)로 행했기 때문이라고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외치고 있다.
남유다 말기에 요시야의 위대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결국 멸망하게 된 것은 므낫세 왕이 여호와를 격노케 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가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왕하 23:26; 24:3).26)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멸망은 이스라엘 왕들의 범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요컨대 지도자는 공동체의 대표자로서 회개치 않은 죄는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죄의 파급효과가 크고, 또 죄에 대한 처벌 또한 집단성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지도자의 죄는 한 개인의 죄가 아니라 공동체와 운명을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잘 아셨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범죄할 때 반드시 누군가를 보내어 죄를 깨우치게 한 사실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III. 구약성서에서 지도자의 죄를 다룬 경우
구약성서에서 지도자가 죄를 지었을 때, 이를 다룬 경우를 몇 가지 살펴보겠다. 지도자가 죄를 지은 경우에 하나님은 반드시 누군가를 보내 이들의 죄를 깨닫게 하였다. 주로 선지자들이 보냄을 받아 이들의 죄를 책망 하거나 깨닫게 했다. 지도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이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1. 거짓 선지자에 대한 처벌 규정
신명기 13:1–5에는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 우상숭배를 부추길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말한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가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원래 참 선지자의 진위를 가리는 방법은 그가 말한 바가 이루어지느냐가 관건이었다(신 18:22). 그런데 신명기 13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선지자가 말한 바가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가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임을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에게 대응하는 방법을 3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그의 말을 듣지 말라고 했고(3절), 둘째 이런 거짓 선지자의 유혹을 따르지 말고 계속 해서 여호와를 따르고, 그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고(4절), 셋째 이런 거짓 선지자를 죽이라고 명하고 있다(5절).28) 신명기 13장에는 거짓 선지자나 꿈꾸는 자뿐만 아니라, 가족 중에 우상숭배를 유인하거나, 어느 한 성읍이 우상숭배를 유인할 경우에도 모두 사형을 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죄의 파급효과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5, 11절). 그렇다면 누가 거짓 선지자를 처형했을까? 신명기 13:5에는 처형의 주체를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개역개정판 번역(“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과 달리 원문은 행위자가 빠진 수동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역 성경 중에 RSV, ESV, NASB는 모두 이를 “But that prophet or that dreamer of dreams shall be put to death.” (“그러나 그 선지자나 그 꿈꾸는 자는 사형에 처해질지니라”)라고 번역하고 있다. 신명기 13:1–5의 맥락에서 단지 메시지를 받는 대상을 “너희”(단수 혹은 복수)에게 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근접맥락과 신명기의 맥락 속에서 처형의 주체를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인 접근일 것이다. 바로 이어서 나오는 가족 중에 우상숭배를 유인한 자에 대한 처벌 규정(신13:6–11)을 보면, 9절에 처벌의 주체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먼저 이를 목격한 증인이 손을 대고 이어서 모든 백성이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신명기 전체의 가르침을 고려하면 단수의 증인에 의한 처형은 할수 없다. 신명기 19:15–21에는 범죄 사실을 규명하는 데는 반드시 두세 증인이 필요했다. 만약 증인이 거짓으로 드러나게 되면, 거짓 증인에게 동일한 처벌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요컨대, 거짓 선지자의 처형은 그의 범죄 사실을 목격한 복수의 증인들에 의해서 범죄 사실을 확정한 후에 먼저 증인들이 손을 대고 이어서 백성들에 의해서 처형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2. 사울 왕의 죄에 대하여
사무엘상 15장에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아말렉의 모든 남녀노소와 짐승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3절).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 르비딤에서 제일 먼저 맞아 싸운 적이었다(출17:8–16).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뒤에 처진 약한 자들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응징을 명하신 것이다(2절).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아말렉은 진멸하였으나, 아말렉 왕 아각과 짐승 중에 좋은 것은 죽이지 않고 끌고 왔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명백한 불순종의 죄를 범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의 불순종에 대해 한탄하시며 사무엘을 보내신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분명하게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에게 2번씩이나 거짓말하며 변명한다(15, 20절).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직에서 버린 사실을 알리자,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다(24절). 그런데 사울이 진정으로 회개했는가? 그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단지 ‘사무엘에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한 것뿐이었다(24절).
그는 사무엘에게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25절)라고 요청했다. 그가 단지 원했던 것은 왕으로서 자신의 위신을 세워 하나님 앞에 경배하길 원했던 것이다(30절). 사울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쳤더라면 사무엘의 책망을 듣고 아말렉 왕 아각을 즉시 죽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각을 죽인 자는 사울이 아니라 사무엘이었다(33절). 만약 사울이 진정으로 회개했더라면 제2의 기회가 주어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2번씩 사무엘에게 거짓말과 변명을 하였고, 하나님께로 향한 진정한 회개가 없이 위기 모면을 위해서 사무엘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하게 되었다.
3. 다윗 왕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을 들었던 다윗 왕도 일생에 두 번 큰 죄를 지었다. 한 번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지은 후 그의 남편 우리아까지 죽인 죄였고(삼하 11장), 또 한 번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려고 인구조사를 했던 죄(삼하 24장)를 지었다. 다윗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의 죄를 깨우쳤다.
사무엘하 11장에 의하면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범하고 이를 덮기위해서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서 돌아오게 해서 아내와 동침하도록 유인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그를 전장의 일선으로 내보내 죽게 만들었다.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동시에 지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 다윗의 죄를 깨우치고 책망한다(삼하 12장). 다윗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솔직히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회개하게 된다. 사울과는 달리 그의 회개는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회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도 다윗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한다(삼하 12:13).시편 51편을 통해서 다윗이 진정으로 회개한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다윗이 회개했지만 그의 범죄에 따른 벌은 받게 되었다. 나단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대로 나중에 다윗의 자식들이 칼로 죽임을 당했고, 아들 압살롬에 의해서 첩들이 겁탈을 당하게 되었고,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게 되었다(삼하 12:10–14). 다윗이 회개함으로 자신의 죄는 용서받았지만 죄에 따른 벌이 얼마나 큰가를 느끼게 한다.
사무엘하 24장에 의하면 다윗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인구조사를 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1–3절).36) 9개월 20일 만에 인구조사를 마치고 요압은 이스라엘 중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 명이요 유다사람이 50만 명임을 보고한다(8–9절). 인구조사 후에 다윗은 자신의 죄를깨닫고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라고 하면서 회개한다(10절).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어 그가 범한 죄에 대한 벌을 내리기 위해 3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요청한다. 이스라엘 땅에 7년간의 기근을 당하거나 다윗 왕이 원수들에게 3달 동안 쫓겨다니거나 아니면 사흘 동안 이스라엘 땅에 전염병이 임하는 것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13절). 다윗은 마지막 벌을 선택하여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전염병에 죽임을 당했다(15절). 한 사람 지도자의 미련한 선택으로 인하여 무고한 백성 7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도자가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그의 죄에 대하여 징계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아합 왕의 죄에 대하여
열왕기상 21장에 따르면 아합 왕은 아내 이세벨의 음모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게 된다. 여기서 아합은 나봇을 죽였기 때문에 제6계명을 어겼고, 동시에 남의 포도원을 탐해 빼앗았기 때문에 제10계명을동시에 어기는 죄를 범했다. 이때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 그의 범죄에 대하여 엄중한 심판을 선포한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서 전한메시지는 선지자로서 목숨을 걸고 전한 메시지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2)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왕상 21:21–24).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 역대 왕들 중에 가장 악한 왕 중에 하나였던 아합은 엘리야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게 된다. 그는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녔다”(27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의 회개는 참된 회개였다.
그래서 이렇게 악한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 그의 ‘겸비함’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아들의 시대로 재앙을 연기하게 되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합의 회개로 말미암아 그의 가문에 대한 징계가 연기되기는 하였지만, 아합 자신은 곧 전쟁에서 전사하여 사마리아에 노출되게 되었고(왕상22:38), 그의 아들 여호람은 엘리야의 예언대로 피살되어 나봇의 포도원에 그의 시체가 던져지게 된다(왕하 9:25–26).
지금까지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경에는 우상숭배를 유인하는 거짓 선지자나 가족이나 성읍에 대해서 범죄 사실을 증인들을 통해 확인한 이후에 복수 증인의 주도로 처형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특히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죄의 파급효과를 막기 위해서 가나안 7족속들에게 행해졌던 멸절의 명령을 우상숭배자들에게 행한 것으로 볼수 있다. 왕정시대에는 범죄한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였고, 그들의 죄에 상응하는 징계를 선포한 것을 알수 있다.
중요한 점은 회개한 왕에게는 제2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회개치 않은 왕에게는 다시는 제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구약시대에 증인들을 통해서이든 선지자를 통해서이든 지도자의 범죄에 대해서 죄를 깨우치거나 처벌한 것이 이들에 대한 대응이었음을 알 수 있다.
IV. 신약성서에서 지도자의 죄를 다룬 경우
신약성서에도 죄를 지은 지도자들에게 대응한 몇 가지 사례를 찾아볼수 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죄에 대한 세례 요한의 대응과 베드로가 복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때 바울이 대응한 것과 거짓 교사들에 대한 가르침 등을 살펴보겠다.
1. 헤롯의 죄에 대하여
분봉 왕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한 사실을 세례 요한은 알고 헤롯을 책망한다(막 6:17–18; 마 14:3–4; 눅 3:19–20).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전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막 6:18). 세례 요한이 이렇게 외친 것은 헤롯의 행동이 율법(레 18:16; 20:21)에 위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례 요한이 공적으로 헤롯의 결혼이 율법에 위배된다고 비판을 했다면, 헤롯은 세례 요한을 선동적이고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을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세례 요한은 옥에 갇히게 되었고, 헤롯이 귀인들과 함께 생일잔치를 하던 날 헤로디아의 딸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청하자 헤롯은 자신이 한 약속 때문에 세례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막 6:21–28). 세례 요한은 구약세대의 마지막 선지자(마 11:13)로서 왕의 범죄 사실에 대해서 묵과할 수가 없었다.
구약성서에서 흔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행동은 세례 요한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규릭(R. A. Guelich)의 가정처럼 선지자는 율법에 기초해서 왕의 죄를 책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선지자는 왕에게 정의를 외친 결과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되었다.
2.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2:11–14에는 베드로가 안디옥에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오자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의 함께 음식을 먹지 않게 된 것을 두고 바울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를 책망한 내용이 나온다. 베드로가 어떤 면에서 책망 받을 행동을 했는가? 코울(R. A. Cole)은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탁교제를 중단한 것은 이방인들과 함께 성찬을 나누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사태는 심각하다. 이는 교회공동체를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분열시켜 담을 쌓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복음의 가르침과 역행하는 행동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외식”(13절)으로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14절)으로 규정하고 그를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이다. 베드로의 행동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은 유대인 기독교인들보다는 뭔가 떨어지는 사람들처럼 느끼게 만들 수 있고, 복음의 충만함에서 뭔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베드로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신실한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들도 함께 동조하게 되어 안디옥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은 좀 과한 것 같지만, 사실 복음의 본질의 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는 공적으로 교정되어야 행동임이 분명하다. 사실 사도의 연륜을 따지자면 한참 후배 사도인 바울이 사도의 대표자격인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것은 한국의 문화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직분이나 연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이 사건을 이해한다면 바울의 책망은 납득이 간다. 진리가 우선인가 직위나 직분이 우선인가?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본문을 해석하면서 “여기에 직위나 직분보다 진리가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이다.”라고했다. 복음의 진리 수호를 위해서 때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죄는 죄라고 선포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3.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신약성경이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는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여기서 논지와 관련 있는 항목만 간략히 다루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이 거짓 교사들이었는가? 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보겠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거짓 교사로 간주하고 그들의 위선을 공개적으로 적나라하게 폭로하셨다(마 23:1–36). 예수께서 책망하신 종교지도자들은 근본적으로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마 21:31–32). 마태복음 23장에 따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이었고(3–4절),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자들이요 사람들의 인사와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었고(5–10절), 영혼을 살리기는커녕 들어온 영혼도 죽이는 사람들이었고(13–15절), 성경의 근본정신을 오도하는 자들이었고(16–24절),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더러운 죄악이 가득 찬 자들이었고(25–28절), 의인들을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이었다(29–36절). 이런 위선자들에 대해서 누구보다 강력하게 도전하신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이들의 위선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폭로했기 때문에 이들은 틈만 나면 예수를 흠잡고 죽이려고 했다.
여러 서신들이 거짓 교사들을 또한 폭로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이들이 이단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2:1–22에는 주를 부인하는 거짓 선생에 대해서, 유다서 1:4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단에 대해서, 디모데후서 2:14–19에는 부활이 이미 지나가 버렸다고 주장하는 후메내오와 빌레도라는 이단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1:13–15에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에 대해서, 디모데전서4:1–5에는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짓 교사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1–9에도 말세에 나타날 거짓 교사에 대해서 경고하는 있는데,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갖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요, 동시에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을 당한 자들이다.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이고, 음란의 죄악에 빠진 자(6절)임을 밝히고 있다. 베드로후서 2:1–22에 등장하는 이단의 주된 도덕적 부패함도 음행임을 밝히고 있다. 서신서 기자들은 이들의 죄악상을 때로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때로는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이들이 거짓 교사(사도)임을 밝히고 있다.
요한3서 9–12에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라는 거짓 지도자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이름까지 밝히며 그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그는 사도를 악한 말로 비방하였고, 순회 사역자들을 맞아들이지도 않았고, 이들을 맞아들이는 신실한 성도들까지 교회에서 출교시키는 교만한 사람이었다. 디오드레베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교리적 이단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야망이 문제였다. 디오드레베는 “자리와 권력에 대한 탐욕”이라는 죄에 빠진 자였다.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에 대해서 2가지 조치를 취한다. 성도들에게 그의 악한 행실을 본받지 말도록 가르쳤고(11절), 사도 자신이 가게 되면 그가 행한 일에 대해서 추궁하리라(10절)고 경고하고 있다.
요컨대 신약의 저자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죄악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들의 죄악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때로는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이들의 죄악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공개적으로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세례 요한, 바울, 베드로, 유다, 사도 요한등도 거짓된 지도자들에 대해서 강력히 경고하며 대응하고 있다. 바울이 대선배 사도인 베드로의 과오에 대해서 책망한 것을 보면 직분이나 직위보다 진리의 수호가 우선되어야 함을 방증하고 있다.
V. 누가 지도자의 죄에 대해 회개를 촉구할 것인가?
칼빈은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은밀한 죄와 공개적인 죄”를 구분해서 다루고 있다. 죄의 성격에 따라 다른 본문으로 권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은밀한 죄”란 “마치 외식의 죄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범한 죄가 아니라—이 경우는 교회의 재판을 받을 수가 없다.—완전히 감추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해서 공적인 것도 아닌 일종의 중간적인 성격을 띤 죄”를 의미한다. 그리고 “공개적인 죄”에 대해서 칼빈은 “한두 사람이 목격한 죄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행하여 교회 전체에 물의를 끼친 죄를 뜻한다.”라고 정의하고있다. 공개적인 죄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8:15–17에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절차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칼빈은 보고 있다.
이 경우에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5:20)는 말씀을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칼빈은 보고 있다. 그러나 “은밀한 죄”인 경우에는 마태복음 18:15–17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개인적으로 권고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마 18:15)에 나오는 “네게”라는 말을 “다른 사람은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너만 알도록”이라는 뜻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고 칼빈은 해석했다.
그런데 은밀한 죄를 지은 사람이 계속 고집을 부리고 회개치 않을 때 교회가 개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칼빈은 “가벼운 죄와 무거운 죄”를 구분해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미한 죄에 대해서는 엄중한 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말로 부드럽게 책망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보았다. 반면에 “무거운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는 더욱 엄한 징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말로만의 징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성찬에 참여할 자격을
박탈”하고 출교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자신의 죄를 완전히 회개했을 때,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음을 증언하게 한 후에 교회로 복귀시켜야 한다고 초대교회의 관례를 예로 들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해져야 할 권징에 대한 칼빈의 일반적인 가르침이다. 그런데 권징의 대상이 교회 지도자인 경우에 성경이 가르치는 또 다른 말씀들이 있다.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있어야 한다(딤전5:19). 또 율법은 제자장과 같은 영적 지도자들의 죄에 대해서 더욱 큰 제물을 요구했고 피를 뿌리는 곳도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려야 했고, 이들이 드렸던 송아지 전체를 진영 바깥 재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레 4:1–12). 그뿐만 아니라 레위기 4장은 이스라엘 회중의 죄와 족장의 죄와 일반 평민의 죄에 대한 제물의 크기에도 차등을 두고 있다. 이는 분명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 더 큰 속죄를 요구하는 암시가 아니겠는가? 만인제사장설에 의하면 현재는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에게 회개의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으면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현재 목회자가 동일하게 전임 사역자라는 점과 제사(예배)의 집례, 말씀의 선포, 공적인 기도 등과 같은 사역의 모형적 연속성이 있기에 교회 지도자들의 범죄에 대해서 구약의 이 속죄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옳겠는가? 후자가 더 타당하지 않겠는가? 이 견해가 타당하다면 교회 지도자들의 죄에 대해서는 더 큰 회개가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틀레이는 그의 주석에서 이점을 보고 있다. 여기서 제물의 차등을 둔 것은 곧 역할이 큰 만큼 그의 속죄에 따른 노력이 더 커야 한다고 보았고, 야고보는 선생이나 지도자들이 더 엄격한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경고하고 있는 점(약 3:1)을 예로 들고 있다.
또 고려되어야 할 점은 현시대가 복잡한 만큼 범죄도 고도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세습은 무엇이 문제인가? 성경에서 직접적인 답을 찾기가 어렵다.
교회세습의 배경에 있는 사상과 절차와 동기가 문제이다. 권오훈은 교회세습의 문제는 세속화와 교회의 사유화와 잘못된 권력 욕구와 집단이기주의와 불공정한 경쟁 등이 동기와 배경에 있다고 보고 있다. 더 문제가 되는 점은 교회세습을 위해서 잘못된 신학에 기초한 설교로 교인들을 세뇌시키는 데 있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자식을 후임자로 세우기 위해서 후임자를 양성하지 않는 사역의 실패도 문제이고,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육신적 가족을 초월해야 하는 진정한 제자도의 실천의 결여도 문제가 된다.
이는 지면의 제한 때문에 자세히 논할 수 없지만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교회세습의 동기와 사상과 배경에 따라 십계명 제1, 2, 3, 8, 9, 10계명을 모두 범할 수 있는 위험을 수반한다고 본다. 표절과 대필은 무엇이 문제인가? 표절과 대필은 한국사회에 너무나 만연해 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조차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목회자의 표절에 대해서는 학자도 아닌데, 그렇게 엄격하게 다루어야 하는가 등의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굳이 표절과 대필을 해서라도 학위를 받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되묻고 싶다. 표절과 대필은 도둑질, 거짓증거, 탐심, 부정의 등 복잡한 죄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지도자들의 죄가 은밀한 죄라고 할지라도 위에서 다룬 것처럼 교회와 세상에의 파급효과를 생각할 때 은밀한 죄와 공개적인 죄를 구분해서 다루는 데는 때로 한계가 있다.
게다가 교회 지도자의 죄가 드러난 경우에 교단의 법을 따라야 하는데, 법 집행에 있어서도 한계가 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장로교의 경우에는 노회에서 목사를 권징한다. 담임 목사의 죄에 대한 보고서가 상회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를 순순히 응해서 올리는 목회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 자신의 죄에 대해서 변명하거나 부교역자들을 시켜서 교인들을 세뇌하거나 상회로 올라가더라도 로비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안건이 처리되지 않도록 방해한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위와 같은 복잡한 현실을 감안하여 성경적인 관점에서 지도자의 범죄에 대응해야 할 사람들이나 조직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논하려고 한다.
1. 피해자 혹은 목격자
교회 지도자들의 은밀한 죄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대응해야 할 사람은 그의 죄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피해자나 그의 죄를 본 목격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도 일치하고(마 18:15–17), 구약시대 거짓 선지자를 처치하는 방법(신 13:1–5)과도 맥을 같이한다. 예를 들면, 성추행을 당한 여성도가 있다면 비록 힘들다고 할지라도 담대하게 그의 죄에 대해서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야 또 다른 피해자를 막을 수가 있다.
어려운 점은 지도자에게 이렇게 대응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이단으로 매도될 수도 있고, 때로는 교회불만세력으로 매도될 수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지도자를 위해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담임목사들의 표절과 대필의 예를 들어보면, 이들은 대부분 바쁘기 때문에 부교역자들을 시켜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부교자들은 담임목사에게 진지하게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표절과 대필의 심각성을 모르는 경우에 이것이 어떤 죄를 수반하는가를 분명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 피해자나 목격자의 권고를 듣고 교회 지도자가 회개하면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음 단계로 행동을 옮겨야 한다. 개인적인 권면을 해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마 18:16)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예를 들면 장로교회의 경우에는 가능하면 장로 한두 사람에게 피해자나 목격자는 지도자의 회개를 위해서 알리고 함께 찾아가 권면하면 좋을 것이다. 그 이유는 대상이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이기 때문이고, 또 장로는 목회자와 동등한 치리권을 갖고 있기에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두세 사람이 함께 찾아가 권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교회 치리기관에 공식적으로 보고하고 치리하게 해야 할 것이다.
2. 교회 치리기관과 목회자와 신학자의 역할
두 단계에 걸친 권고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가 회개하지 않을 때 그 다음 단계로 교회 치리회에 넘겨지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두세 사람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을 때 교회에 알리라고 한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마 18:17). 프랜스(R. T. France)는 여기서 ‘교회’란 ‘지역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지역 교회가 해야할 일은 일차적으로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데 초점이 있다고 보았다.
또 공개적인 지도자의 죄는 곧 바로 이 단계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이 단계에서는 장로와 같은 치리회 멤버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가 치리를 행하지만 교인들이 모두 모여서 논의할 수는 없다. 그래서 교회에 장로와 같은 리더십을 세우고 치리회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치리회 구성원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공정하게 판단하고 권면하는 것이 지도자의 회개와 회복에 너무나 중요하다고 본다. 만약 교회의 치리회가 자체적으로 죄의 진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경우에 교단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에게 요청해서 말씀에 입각해서 최대한 공정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미 이 단계에 이르면 지도자의 의심되는 죄가 공개적으로 알려지기 때문에 교단이나 대외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본다.
구약시대에 지도자들의 죄를 책망한 일차적인 그룹은 선지자들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는 말씀의 선포자라는 관점에서 현시대의 목회자의 역할과 상당부분 연속성을 지닌다고 본다. 목양의 사명을 맡은 베드로를 역시 목양의 사명을 맡은 바울이 책망했던 것처럼, 지역교회 지도자 디오드레베의 잘못을 사도 요한이 책망했던 것처럼 교단의 목회자들은 공명정대한 정신으로 동역자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할 때 직분이나 직위보다 진리 수호를 더 우선순위에 두었던 것처럼, 목회자는 하나님의 진리수호를 위해서 최대한 공정하고 객관성 있게 사건을 분변할 사명을 갖고 있다.
여기에 또한 신학자들의 역할도 있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안수 받은 목사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역시 구약시대의 선지자적 사역의 연속성이 있다고 믿는다. 위에서 보았듯이 현시대의 지도자의 죄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리라고 본다.
예를 들면, 표절과 대필의 문제가 나오면 조사를 하기 위해서 학문적인 전문성이 필요하고 때로는 전공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학문적인 소양을 갖춘 교단 신학자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나중에 표절이나 대필을 조사한 사람들의 권위에 대해서 도전을 받지 않게 된다.
지역교회의 치리회원 중에 다른 분야에 아무리 탁월한 학문성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신학적인 문제에 개입하게 되면 ‘전공자도 아닌 사람’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마련이다. 교회세습의 문제도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일어난 교회계승을 교회세습으로 몰아붙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세습과 정당한 교회계승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여기에도 정말 고도의 신학적인 지식을 지난 신학자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본다. 교회를 자식이나 사위 등에게 세습해야 하는 근본 동기와 과정과 사상을 모두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동기는 없는가? 은퇴하는 담임목사가 뒤에서 조종하고자 하는 욕망은 없는가?
세습에 이기적인 동기는 없는가? 후임자의 영성, 덕성, 거룩한 지성, 사역의 능력, 하나님 나라의 비전 등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경쟁과 검증의 과정을 통과했는가? 자식을 후임자로 앉히기 위해서 잘못된 신학으로 교인들을 세뇌한 적은 없는가? 후임자 리더십 양성을 위해서 노력한 흔적은 있는가? 가족을 초월한 진정한 제자도에 대한 헌신이 있는가? 등을 고려해볼 수 있겠다. 교회세습을 주도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이런 항목을 지켰는지 의심스럽다.
교회 지도자의 죄가 분명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덮기 위해서 만약 (부)교역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동원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과거의 사건들을 보면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부교역자는 담임목사의 눈치를 보고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경우가 있었다. 담임목사의 죄를 덮는 데 동조하지 않은 부교역자는 결국 사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신학자들 중에도 의식 없는 사람들은 범죄한 지도자를 회개하도록 돕기보다 죄를 합리화하거나 덮거나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죄냐 진리냐를 선택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거짓 선지자들의 길로 가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위에서 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꼭 명심할 필요가 있다.
3. 교단 치리기관
교회 지도자의 죄가 큰 죄인 경우에는 칼빈이 말한 대로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고 할지라도 일정기간의 징계는 불가피하다고 본다. 박혜근은 지도자의 죄를 엄히 다루어야 할 이유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교회의 지도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책임을 지고 있고 그런 까닭에 지도자의 범죄는 교회에 중대한 손해를 끼치게 된다. 지도자의 죄를 공개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죄는 전체 회중에게 범한 것이 되기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의 범죄는 그리스도의 명예에 크나큰 오점을 남기고 신자들에게는 부끄러움과 죄의 도발을 초래한다. 이런 이유로 지도자에 대한 징계는 일반 신자들의 그것보다 더 준엄한 것이어야 하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른 사람들마저 죄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생생한 경고를 주게 된다.
지도자의 죄에 대해서는 더욱 준엄한 징계를 행해야 한다는 박혜근의 주장은 구약성경에 제사장과 같은 영적 리더십에 제물의 차등을 둔 속죄제의 원리와도 일맥상통하다고 본다. 그런데 실상 목사의 징계 시에 (예를 들면, 장로교의 경우에는) 지역교회가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노회에 상소할 수밖에 없다. 이때 합법적인 절차를 위해서 노회에서 파송한 임시당회장이 당회를 주도하여 결정한 후에 노회로 상소해야 적법할 것이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대로 교회의 치리회에 권징의 권한이 있음을 인정할지라도 현재 교단의 법을 우회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역교회에서 장로를 중심한 치리회에서는 지도자의 범죄에 대해서 권면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정도에 그쳐야 할 것이고, 실제 징계는 노회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노회에서는 죄에 상응하는 수찬정지와 사역중지 및 교제 중단 등의 징계를 내릴 수 있다. 어느 교단에서 목사의 성추행이 드러난 후에도 4년이 넘도록 노회에서 징계하지 않는 것은 교단의 수치요, 한국교회의 수치이다.
이는 칼빈이 우려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죄의 파급효과를 확장시키고, 범죄한 당사자로 하여금 회개의 길을 막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추행자에 대한 세상에서의 처벌 기준에도 못 미치는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에 대한 권징의 현실 때문에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더욱 신뢰를 잃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권면, 두세 사람의 권면과 치리기관에서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교회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교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자에대해서는 교단의 법적인 절차를 따라 빠른 시간 내에 해임시키고 출교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냥 두면 교회 공동체를 함께 부패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현저히 가리고 교회의 신뢰를 더욱 추락시키기 때문이다.
4. 교단, 교회개혁 단체, 신학회의 역할
현실적으로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중대한 죄를 지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이 현실적인 한국교회의 문제이기 때문에 필자는 교단과 교회개혁 단체와 신학회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교인들의 도덕성을 함께 땅에 떨어뜨리는 죄의 파급효과를 생각할 때, 또 지도자라는 중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책벌의 집단성을 생각할 때, 죄를 방치하게 되면 에스겔에게 경고한 파수꾼의 사명(겔 33:1–9)을 다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성경의 역사는 죄가 쌓여 하나님의 인내의 임계점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그 공동체 전체를 처벌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아시대에 인간이 극도로 악해지자 홍수로 심판하셨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임계점에 달하자 유황불로 심판하셨고, 가나안 7족속의 죄악이 쌓이자 이스라엘을 들어 멸절하셨고,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극도에 달해 하나님을 버리자 바벨론 유수의 심판을 내리셨다. 일제 강점기에 각 교단마다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교회적 우상숭배에 빠지자 분단과 6·25라는 심판을 사용하셨다는 오래전 선각자들의 외침은 잘못된 것인가?67) 또 다른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아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깨어나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흉악한 죄악들에 대해서 ‘죄는 죄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교단과 교회개혁 단체와 신학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먼저 교단적 차원에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잘못된 교회세습과 헌금유용과 같은 죄악을 막기 위해서 교회세습 방지나 헌금유용 방지를 위한 입법화가 시급하다고 본다. 일부 교단에서 이미 교회세습 방지법을 통과시킨 것은 좀 때 늦지만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회)가 2012년 교회세습을 교단 법으로 금지 가결하면서 2013년에는 예장 통합측과 기장측이 법으로 금지하였다.
아직 입법화되지 않은 교단들도 입법을 추진하길 기대해 본다. 교회개혁 단체들도 교인들의 잘못된 의식을 깨우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세습과 같은 잘못된 관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순회강연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어떤 지도자의 흉악한 죄가 드러났을 때, 이에 대한 적절한 공적인 목소리를 발하는 것도 아직도 교회에는 양심적인 성도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세습방지를 입법화하기까지 이런 단체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모두 침묵하게 되면 누가 이런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고 입법화 하겠는가? 무엇보다 교회 지도자의 죄가 공개적으로 드러났을 때, 한 개인이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발한다고 할지라도 별효과가 없고, 그리고 그 개인이 여러 가지로 중상과 모략과 유언비어와 같은 정치적인 대응으로 고난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개혁단체에서 함께 목소리를 발하게 되면, 이런 개인적인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위에서 말한 대로 현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의 죄는 고도로 지능화되어 있기 때문에 첨예한 신학적 분별력을 때로 요한다. 대표적으로 표절과 대필과 같은 죄는 결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필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필하는 사람이 주로 뭔가를 보상이나 혜택을 받고 하기 때문에 지도자나 대필자가 입을 열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표절의경우에도 국제적인 명백한 표절을 범하고도 각가지 합리화의 도구를 동원해서 덮으려고 하고, 로비활동을 하기 때문에 죄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기가 너무나 힘들다. 세상에서는 학회가 주동이 되어 표절자의 진위를 가려내고 처벌을 위한 가이드를 제공하는데, 왜 하나님의 진리를 맡은 신학자들의 모임인 신학회는 할 수 없는가? 정치적인 대응이 두려운가? 올바른 소리를 냈다가 목이 잘린 세례 요한의 진리를 위한 희생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진리를 위해 부름 받은 주의 사역자에게 무엇이 두렵겠는가?
만약 신학자들이 명백한 표절 혹은 대필 사실을 알고도 침묵을 지킨다면, 세상의 학회보다 더 신뢰할 수 없는 도덕적 분별력이 없는 모임으로 평가되지 않겠는가?
VI. 결론
현재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지도자의 죄에 대한 입장은 주로 덮어버리거나 맞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라는 식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런 잘못된 관행은 오랫동안 지도자의 죄에 대해서 침묵하도록 설교로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본 소고에서 지도자의 무거운 범죄는 죄의 파급효과 면에 있어서 그리고 죄에 따른 처벌의 집단성이라는 관점에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함을 살펴보았다. 구약성서에는 거짓 선지자의 죄와 사울의 죄와 다윗의 죄와 아합의 죄에 대해서 반드시 목격자나 선지자를 보내서 대응한 것을 보았고, 또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은 것을 보았다. 신약성서에도 헤롯의 죄와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과 거짓 교사들의 죄에 대해서 선지자나 사도들이 적절히 대응한 것을 보았다. 특히 베드로의 공개적인 죄에 대해서 바울은 직분이나 직위에 상관없이 공개적인 책망을 한 것을 통해 직위나 직분보다 진리가 우선이라는 원리를 깨달았다.
교회 지도자가 무거운 죄를 지었을 때 대응해야 할 방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 지도자의 은밀한 죄는 피해자나 목격자가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증인으로 참여케 하여 권면하도록 한다. 둘째,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교회 지도자와 공개적인 죄를 지은 교회 지도자의 죄에 대해서는 교회의 치리회에 보고하고 치리회에서 그의 죄를 깨닫도록 최선을 다해 권면한다. 이때 도움이 필요하면 죄를 올바로 규명하기 위해서 교단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셋째, 교회 지도자의 무거운 죄는 (장로교회인 경우에) 노회가 파송한 임시당회장 목사의 주관으로 치리회에서 결정한 바를 노회에 보고하고 죄에 합당한 징계의 과정을 거친 후에 해벌을 하는 것이 합당한 절차라고 본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않는 자는 거짓 교사로 여겨서 해임하고 출교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본다. 넷째, 현재 한국교회의 지도자의 무거운 죄에 대해서 권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과 범죄의 고도화를 고려하여 교단적 차원에서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입법화와 교회개혁 단체에 의한 교화와 지도자의 범죄시에 연합된 목소리를 발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또 죄의 진상을 밝히는 데 신학적 전문성이 요구되는 무거운 죄에 대해서는 신학자들로 구성된 신학회가 진리수호의 차원에서 공적인 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시대에 시급히 교회에 회복되어야 할 참된 교회의 표지가 있다면 권징의 신실한 이행일 것이다. 칼빈도 “어떠한 사회도, 아무리 적은 가족이라도 권징이 없이는 적절한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으니, 가능한 한 질서를 잘 유지해야 할 교회로서는 더욱 더 권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권징을 제거하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권징의 회복을 방해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알지 못하고 하든 고의적으로 하든 간에—궁극적으로 교회를 와해시키는 일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했다.
여러 지도자의 범죄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교회가 회복되는 길은 교회나 세상에 부끄럽지 않도록 이들을 신실하게 권징해야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확신을 심어주게 되고 사회 속에서 신뢰가 회복될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