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세습에 대한 구약학적 고찰

교회 세습에 대한 구약학적 고찰

전성민 교수의 글 요약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 구약학,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
 

1. 세습의 의미
세습은 “부와 권력 혹은 영향력이 혈연으로 엮어진 선후대 사이의 이전(移轉)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따라서 “세습”이라는 표현이 정당한지 아닌지의 문제는 그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특권의 이양”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지 여부와 직결될 것이다. “세습”이라는 표현은 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 부모에서 자녀로 담임목사직이 이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담임목사라는 직분의 세습 뿐 아니라 “교회 세습”이라고 까지 불릴 만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세습이라는 표현은 어떤 권리의 이양을 말하는 것이며 교회는 그렇게 이양되는 권리가 아니라고 그래서 “교회 세습”이라는 표현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미 한국 교회의 몇몇 경우들은 교회가 대를 이어 이양될 수 있는 특권의 총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경우 “세습” 또는 “교회 세습”이라고 까지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세습의 원인
(1) 한국 사회의 혈연주의와 (2) 한국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로 요약될 수 있다.  

1) 혈연주의에 대한 구약의 통찰
세습이 혈연주의 때문이라는 설명은 여러 통로를 통해 지적되어왔다. 기독교는 혈연이 아니라 언약의 종교임을 천명했다. 이정석 교수도 “아들이 아버지의 가장 적절한 후계자라는 사고는 의심의 여지없이 혈연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시대에는 아론의 제사장직이 세습되었으며, 다윗의 왕직도 세습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혈족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죄되었고, 진정한 이스라엘은 육적 후손이 아니라 영적 후손임을 바울이 분명히 하였다.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적 측면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혈족의 의미를 무시하였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혈족주의적 사고를 버리도록 명령하였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10.37) 따라서, 교회는 철저히 혈족주의를 부정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영적 가족의식을 중심으로 형성 발전되었다.

여기서 언급된 대로 아론의 제사장직과 다윗의 왕직이 세습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서술일 뿐, 성경이 바람직하게 제시하는 리더십과 관련해 규범적이지 않을 수 있다. 구약 성경의 역사적 기록들은 그것이 기록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벌어졌던 일들이 규범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 가운데 벌어졌던 일들은 구약 전체(그리고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궁극적으로 성경 전체)의 지향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신의 아내라고 속인 사건이나 야곱의 속임수들이 우리에게 규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했음을 성경이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구약 성경 또한 혈연주의를 따르지 않는다.(어떤 의미에서 왕직의 세습이 규범적인 리더십 이양이 아닌지는 후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구약이 혈연주의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예들은 가장 혈연을 중시하는 듯한 여호수아서에서조차 찾아볼 수 있다. 여호수아서는 가장 혈연적인 혹은 민족적인 책으로 흔히 오해된다. 단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가나안 사람들이 멸절을 당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혈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 대한 신앙, 혹은 언약을 통해 이루어진 공동체임을 여러 사건들을 통해 분명히 보여준다.

먼저 여호수아의 초입에서부터 우리는 혈통적으로는 가나안 사람인 라합이 헤세드에 토대한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목도한다. 두 번째로, 여리고성에서의 승리 이후, 아간의 범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거의 멸망 직전에 이른다. 이 때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패한 이유를 여호와께서 설명하시는 본문이 7장 11-12절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본문에서 “온전히 바친 물건” 또는 “온전히 바친 것”이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헤렘”의 번역으로 가나안 사람의 “진멸”을 말할 때 사용되는 것과 같은 단어이다. 이 단어는 7장 1절에도 등장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헤렘]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헤렘]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런 관찰들을 토대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언약을 배신한 이스라엘은 그들이 “헤렘”시켜야 했던 가나안과 마찬가지로 “헤렘”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그들이 혈통적으로는 여전히 이스라엘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나안과 다를 것이 전혀 없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었던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지켰던 언약 때문이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라합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던 여호수아의 기록은 아간의 범죄를 거쳐 기브온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기브온 주민들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게 된 과정이 완전히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기브온 주민들은 비록 나무패고 물 긷는 종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이 기브온 주민들의 이야기에서도 혈연이 아니라 언약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기준임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호수아는 언약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수23:16) 여기서도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살아갈 수 있던 근거는 그들이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약속해 주셨던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언약을 지키기 때문임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했던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결국 열왕기하에 이르러 끝나게 된다. 그들은 혈연적 이스라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호수아 시절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었던 이방 민족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약 시대에도 혈연이 아니라 언약이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본질적인 요소임을 보여준다.

2) 권위적 지배구조에 대한 구약의 통찰
이승종 교수는 “세습이 수용되는 원인”으로 “교회의 권위적 지배 구조”를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권위적 지배 구조가 “교회의 위계적 계층제”를 활용한 “가시적 권력”, “반대의사의 표출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비가시적 권력”, “설교와 교육을 통하여 세습의 정당성에 대한 부당한 믿음을 도출”하는 “잠재적 권력” 등을 통해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강화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권위적 지배구조 하에서 작용하는 권력은 그 유형을 막론하고 “착취적 권력”이라는 공통점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것은 “목사는 평신도 위에 일방적으로 군림하고, 평신도는 마치 전제군주의 신하와 같이 저항없이 묵종”하게 만들고 그 결과 세습이 “유효한 저항없이 저질러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에서 목사와 소위 “평신도”간의 권력 관계를 전제군주와 신하로 비유한 것은 흥미롭다. 사실 김동호 목사 또한 세습의 근본원인으로 “비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지적하며 “담임목사가 왕과 같은 힘을 가진 교회는 담임목사 세습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경우 세습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들이 적절하다면 한국 교회의 세습에 관한 논의를 위해 이스라엘의 왕정을 살피는 것은 의미있는 통찰을 줄 것이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고백과 예수님이 다윗 왕의 자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왕정에 대해 은연 중에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왕정에 대한 구약의 평가, 특히 소위 신명기 역사의 평가는 냉정하다. 왕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평가 뿐 아니라 왕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왕위의 혈연 계승에 대해서도 성경의 평가는 명확히 부정적이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왕정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사사기 8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삿8:22)라고 청할 때이다. 여기에 왕이라는 단어가 명시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세습되는 통치에 대한 언급은 왕정을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컨대 왕이 되어달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요청에 기드온은 자신이나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여호와가 그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정답”을 말한다(23절). 그러나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그들이 미디안에게 탈취한 귀고리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을 받고 백성들이 “즐거이” 드린 금 귀고리가 천칠백이었다. 이것을 세겔의 양으로 생각하고 한 세겔을 12그램 정도로 계산하면 약 20킬로그램이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초승달 장식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을 기드온이 가지게 된다.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이 언급되는 것을 통해 우리는 기드온이 말로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왕의 권세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기드온의 왕적인 권세는 그의 아내가 많았다는 사실과 그들을 통해 얻은 아들이 칠십 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명확히 감지할 수 있다. 칠십이라는 아들의 수는 후에 아합의 아들들의 수와 동일하다(왕하10:1). 더욱이 아내들을 통한 아들 외에도 첩에서 얻은 아들도 있었는데 그의 이름의 뜻은 “내 아버지는 왕”(아비멜렉)이었다.

기드온은 자신 실제적으로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으나, 그는 말이라도 왕이 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세겜에서 실제로 왕이 된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기 위해 세겜 사람들을 설득했던 논리는 매우 혈족주의적이다. 아비멜렉은 먼저 세겜에 있는 자신의 외가 식구들에게 어차피 누군가가 그들을 다스려야 한다면 자신이 그들의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요청하고, 아비멜렉의 외가 식구들은 그 말을 세겜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리고 그 말에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아비멜렉이 “우리의 형제”가 된다고 말하며 그가 왕이 되는 것을 지원한다. 그러나 이렇게 혈연에 바탕을 두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으며 왕정 자체가 가치 없는 것이라는 것이 이어지는 요담의 우화의 핵심 주장이다. 결국 요담의 말대로 결국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손에 멸망당하고, 아비멜렉도 그 사건과 연관되어 죽게 된다. 이것이 이스라엘 가운데 세워졌던 첫 왕의 운명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왕이 왕적 권세를 누렸던 기드온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며, 사실상 기드온 또한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후광 속에 성장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요아스-기드온-아비멜렉으로 이어졌던 한 집안의 권세는 비극적 파멸로 끝나고 말았다.

사사기에는 여섯 명의 대사사 외에도 여섯 명의 소사사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 첫 소사사인 삼갈을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사사는 기드온과 아비멜렉 이야기 다음과(돌라, 10:1-2; 야일, 10:3-5), 입다 이야기 다음에 나온다(입산, 12:8-10; 엘론, 12:11-12; 압돈, 12:13-15). 이 소사사들에 대한 기록이 자녀들을 언급하는 것은 흥미롭다. 야일의 경우, 아들 삼십 명, 입산은 아들 삼십과 딸 삼십 명, 그리고 압돈은 마흔 명의 아들과 서른 명의 손자가 있었다. 후손들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기드온의 칠십 아들과 아비멜렉의 사건과 더불어 왕정을 연상시키는 기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왕정을 연상시키는 소사사들에 대한 기록은 사사기 전체 맥락 속에서 부정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사사기의 전체 구조에서 기드온 이야기는 전환점을 이룬다. 대사사의 경우 기드온 보다 앞에 나오는 옷니엘, 에훗, 드보라의 경우 긍정적인 측면이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기드온-아비멜렉 이야기글 전환점으로 그 후에 나오는 입다와 삼손은 사사 시대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사기 전체 구조 속에서 기드온-아비멜렉 유사왕조의 실패 이후에 나오는 소사사들의 자녀에 대한 언급은 그러한 자녀를 많이 둔, 그래서 혈연적인 특권이 작동하는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범 사사로 제시되는 옷니엘의 경우, 그의 자녀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더욱 지지된다.

사무엘상 8장에서 사무엘은 늙어 그의 아들인 요엘과 아비야를 사사로 세운다. 그러나 그렇게 계승된 사사들은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산다(삼상8:3). 그리고 그들의 잘못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중심으로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는 계기가 된다. 요컨대 사무엘의 사사 세습은 잘못된 것으로 실패하고 만다.

이러한 지도력 세습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왕위 세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먼저 이스라엘의 첫 왕이라고 여겨지는 사울의 경우, 그의 아들 요나단이 왕위를 이어 받지 않고, 새로운 인물인 다윗이 그 다음의 왕이 되었다. 그것을 사울의 잘못 때문이기도 했으나(삼상15:26-28) 이스라엘의 첫 왕이 그의 왕권을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다윗이 왕이 된 후 그에게 주어진 나단의 신탁은 사울과는 달리 다윗 왕조 안에서의 왕위 계승을 긍정한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삼하7:11-16)

이 나단의 신탁은 다윗 왕조와 그 안에서 벌어질 왕위 세습을 긍정하며 신학적으로 지지한다.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여호와께서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또한 설령 그 세습한 왕이 범죄한다 하더라도 잠시 징계는 있겠지만 사울과는 달리 은총을 빼앗지 않고 그 왕가와 나라가 여호와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그 왕위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보다 더 왕위 세습을 긍정하는 본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과 관련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과(역사상의 이스라엘 왕국은 망했다!) 그렇게 이 약속을 “실패”하게 만든 것은 권력을 세습하며 누렸던 왕들의 잘못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역사적 층위에서는 깨질 정도로 다윗 왕조는 잘못되어버렸던 것이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경우, 결국 배교로 끝나, 왕국이 둘로 쪼개져야 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평가받으나, 그는 신명기 17장에 나오는 왕에 대한 경고를 모두 범하고 말았으며, 그의 아들 르호보함의 통치 아래 유다는 후에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 되는 우상숭배에 빠져 들었다(왕상14:22-24; 왕하17:0-12 비교). 히스기야는 유다의 왕들 중에서 여호와의 가장 확실히 의지 혹은 신뢰(trust)했던 왕으로 소개되고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므낫세는 반종교개혁을 일으키고(왕하21:3 참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몰아내었던 가나안 원주민들 보다 더 큰 악을 행하게 한다(왕하 21:9). 그 결과 여호와는 유다의 멸망을 선언하신다(왕하21:12-15; 왕하23:26). 그렇게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었던 약속이 역사적 층위에서는 깨지고 만다. 요시아는 유다의 왕들 중에서 가장 율법을 잘 순종했고 그에 따라 가장 온전히 돌이켰던 왕으로 소개된다(왕하23:25).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왕위를 세습한 그의 자손들은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들이었다(여호아하스, 23:32; 엘리아김=여호야김, 23:37; 여호야긴, 24:9; 맛다니야=시드기야, 24:19). 그리고 결국 이 네 명의 왕을 끝으로 유다는 멸망하게 된다.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는 모두 어떤 측면에서 유다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왕들이었으나, 그들에게서 왕권을 세습한 그들의 아들들은 모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열왕기서에서 예후, 엘라, 살룸을 제외한 모든 왕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평가된다. 엘라와 살룸은 어떤 평가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예후만 오직 유일하게 여호와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왕조로서는 상대적으로 긴 그런데 그러한 “의로운 예후”로부터 시작된 예후 왕조의 경우에도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여호아하스, 왕하13:2; 요아스, 왕하13:11; 여로보암 2세, 왕하14:24; 스가랴, 왕하15:9). David Lamb은 이 네 명의 예후의 후예들은 고대 근동의 기준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 여지들이 있던 왕들이었으나(긴 통치기간[스가랴 예외]과 군사적인 성공) 신명기 역사 편집자의 왕위 세습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고 논한다. 그리고 이러한 왕위 세습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의로운 지도자 혹은 왕이었던 사무엘,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의 후계자들을 악하게 서술한 패턴과 맥을 같이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런 평가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로운 왕조 설립자가 악한 후계자로 계승되는 신명기역사 편집자의 패턴은 예후 왕조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역사 편집자는 이 패턴을 다윗 왕조와 왕정 이전의 기드온, 엘리, 사무엘 왕조들에 관해서도 반복한다. 따라서 신명기역사 편집자는 왕위 세습을 결함이 있는 제도로 본다. 왜냐하면 왕조 세습을 통해 선택된 지도자들은 전형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신명기역사 편집자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을 왕위를 세습한 지도자들보다 선호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맨 처음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인도와 지지를 얻기 위해서도 여호와께 더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혈연을 통한 왕위 세습을 핵심으로 하는 왕정이 구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권위적 지배구조라면, 구약은 그러한 왕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왕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고 대표해야 하는 근본적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고 하나님을 자리를 스스로가 차지해 버리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며 왕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로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것이다. “그들이 ...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러한 지적 이후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왕의 권력이 어떻게 “착취적 권력”인지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신다(삼상8:10-18). 한 마디로 왕은 애굽에서 해방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종으로 만들만큼 착취적인 권력인 것이다(삼상8:17-18).

혈연에 토대해 권력이 세습되는 왕정에 대해서 성경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바람직한 지도력 승계로 볼 수 있는 예들은 거의 모두 혈연에 기초하지 않고 있다. 모세를 승계한 여호수아, 엘리를 승계한 사무엘, 엘리야를 승계한 엘리사, 이런 승계들은 모두 혈연적 승계가 아니었다.

왕정에 대한 논의는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에 대한 언급에서 시작되었다. 교회의 권위적 지배구조가 세습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라는 이승종 교수의 지적, 비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며 “담임목사가 왕과 같은 힘을 가진 교회”의 경우 세습을 피할 수 없다는 김동호 목사의 지적, 그리고 세습을 핵심 특징으로 하는 왕정에 대한 성경의 평가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한국 교회에서 교회 세습 혹은 담임목사직 세습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담임목사의 권력이 교회라는 조직/공동체 안에서는 왕과 같은 절대 권력이 되었다는 반증이며, 그런 권력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더 이상 하나님을 의존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며, 그런 권력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한다는 것이다.

3. 세습 정당화 구실에 대한 구약의 통찰

세습을 정당화하는 여러 구실들이 있으나 그 중에서 자주 반복되는 두 가지 구실을 들자면 (1) 자녀가 부모의 담임목사직을 계승할 때 안정적인 목회가 가능하다는 것과 (2) 모든 과정이 적법하게 진행되었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들이 있다.

1) 안정적인 목회를 위한 세습?
세습이 안정적인 리더십 이양의 방법이라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후임자가 전임자와 같은 목회철학을 가지고 같은 스타일의 설교를 증거하며 그 교회의 교인들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후임자가 수년간 전임자의 지도력 아래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운 경험들은 후임자로서 가져야 할 가장 귀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여러 성장하는 대형교회에서 아들을 훈련시켜 담임자가 되게 하는 것은 첫째, 목회의 위험부담을 줄이는 현실적인 방안이 되기 때문이며, 둘째, 후임자의 시행착오와 적응의 시간을 줄이는 방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장하는 안정적인 리더십 이양의 핵심은 후임자가 아들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이라는 데 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아들이 아니었지만, 미리부터 준비되었던 사람으로 성공적인 리더십 이양의 예가 된다. 문제는 후임자를 준비시키기 시작할 때 부터 혈연이 기준이 되어 선택된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세습이 진정 안정적인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목회사회학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세습이 안정적 목회를 가능하게 한다는 주장과 관련해서 구약을 중심으로 하는 이 글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왕권이 세습되었던 이스라엘의 경우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북이스라엘이 계속되는 정변으로 인해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불안했다(왕상14:15). 남유다의 경우, 다윗 왕조가 잘 이어진 것으로 보이나 왕조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이 세습되는 왕정이 안정적인 제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등불을 주셨기 때문, 즉,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었다(왕상11:36; 15:4; 왕하8:19). 아버지의 통치 철학을 아들이 잘 이어갔기 때문에 다윗 왕조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졌던 은혜가 다윗 왕조를 지켜냈으며, 여호와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을 때는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던 때였다(삼상8:15).

2) 적법한 절차?
자녀를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과정이 적법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을 논박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에 대해 김동호 목사는 이렇게 서술한다.

세습이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교회에 있어서 실제로는 세습이면서도 정치적으로나 행정적으로는 나름대로 완벽한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세습이 아닌 청빙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나 법적으로는 담임목사의 아들도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 받을 수 있는 객관적인 자격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정당한 절차를 통하여 담임목사의 아들을 후임으로 청빙 하였다라고 이야기하면 뻔히 알면서도 논리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아니라고 반증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구약은 최소한 두 가지 통찰들 줄 수 있다. 먼저, 이사야 10장 1절에는 이런 본문이 있다.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새번역). 법 자체는 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본문이다.

두 번째로,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재판은 절차적으로 합법적인 과정이 권력이 개입했을 때 얼마든지 근본적으로는 잘못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어떠한 일을 행했던 과정이 적법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의 옳음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나봇으로부터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이세벨이 나봇이 사는 성읍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불량자 두 사람을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증언하게 만든다. 이 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증언하는 사람을 두 사람으로 명한 것은 법의 절차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신명기 19장 16절에 의하면 재판에는 두 증인 또는 세 증인이 필요했다. 즉, 나봇이 아합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사실과 증인으로 두 불량한 자들이 세워진 것이 이세벨의 편지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나봇이 사는 성읍의 사람들은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볼 때, 나봇은 적법한 절차를 따라 재판을 받고 그 재판 결과에 따라 적법하게 처형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적법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 속에서는 십계명의 여러 계명들이 범해지고 있었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 그리고 약간 확대한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까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제외하고는 흔히 십계명 중 윤리적 계명이라고 이해되는 5계명에서 10계명까지가 거의 다 범해졌던 것이다.

구약 윤리에서 다루는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로 “법과 윤리의 간극”이라는 것이 있다. 법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것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윤리는 단순한 준법의 수준을 넘는다는 것이다. 룻기에서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싶어서 룻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을 포기했던 “아무개”의 결정의 경우, 그 결정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룻기는 그의 행동이 위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칭송 받을 만한,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의 백성의 수준에는 못 미쳤다는 사실을 보아스의 헤세드를 통해 드러낸다.

구약이 보여주는 하나님 백성의 윤리 수준은 적법한 절차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법과 윤리의 간극”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사실, 어떤 행위가 법의 절차를 지켰다는 사실에 호소하는 방식은 굳이 세습 뿐 아니라 다른 행위들을 정당화 할 때도 가장 흔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적법한 절차를 따랐다”라는 것은 바른 삶의 가장 기초일 뿐, 어떤 행동의 윤리적 가치를 판단하는 의미 있는 기준은 결코 될 수 없다.

4. 판단의 기준
그렇다면 세습을 포함해 어떤 행동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구약 윤리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세 가지 정도의 답을 한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바른 일이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행동을 모방할 수는 없지만 이집트에서 종과 나그네 되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품과 행하신 행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거주하는 이방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따라야할 모방의 대상이었다(신25:18 참고).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을 따르는 것이 바른 일이다.

세 번째로는 “자연법”이 윤리적 행동의 한 토대가 된다.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은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경우 분명히 적용될 수 있는 반면, 하나님과의 구속적 관계 가운데 있지 않은 열방들의 경우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을 판단하시는데 그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예를 들어 아모스 1장에는 하나님은 암몬의 경우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기 때문에 그들을 심판한다고 말씀하신다. 전쟁을 할 때 대적의 여인의 배를 갈라서는 안 된다는 율법은 없다. 그럼에도 이로 인해 그들을 심판하는 이유는 그 행동이 “비인륜적”이기 때문이었다. 신학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하나님의 창조하신 도덕 질서를 깨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자연법”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그 가운데 도덕 질서를 세우셨고, 그런 질서에 대한 인식이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양심” 또는 “상식”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윤리를 생각할 때, 계시적인 하나님의 명령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러한 구약 윤리의 자연법적 특징에 대한 이해는 어떤 것이 바른 행동인가를 판단하는데 있어 폭을 넓혀 줄 수 있다. 요컨대 상식 또는 양심이 (구약)성경 윤리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이러 논의가 세습과 관련되어 의미 있는 이유는 교회 세습이 지금 대한민국 사회와 교회 상황에서 상식적으로 옳지 않다는 지적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세습은 자연법이나 상식이 적용되는 “세상”이 아니라 구속과 계시의 윤리가 적용되는 교회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가 적용되지 못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 안의 잠언의 존재와 그 신학과 윤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상식이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잠언에서 어떤 행동이 권고되는 이유는 그 행동 자체가 옳아서가 아니라, 그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가 유익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 반대로 어떤 행동을 피해야 하는 이유는 그 행동의 본래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그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법”에 대한 구약윤리의 논의는 이러한 상식과 사회적 상황에 근거한 판단 또한 (구약)성경적인 근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수의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흔히 듣지만, 어떤 주장을 다수의 뜻과 일반적으로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거스르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많은 경우 위험할 수 있으며 세습에 관한 문제 또한 이에 속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결론

지금까지, 세습의 의미, 원인, 구실들을 살피면서 각 문제들에 대해 구약이 줄 수 있는 통찰들을 정리했다. 특히 세습의 원인으로 혈연주의와 권위적 지배구조가 지적되어 왔는데,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구약도 명확히 반대하고 있음을 보았다. 기독교가 혈연이 아니라 언약의 종교인 것은 신약에 와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부터 그래왔음을 주로 여호수아의 내용을 통해 확인했다. 구약에 나오는 가장 대표적인 권위적 지배구조로 왕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구약, 특히 역사서는 혈연에 의한 세습을 토대로 하는 왕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권력을 이어받은 자녀들은 정반대의 악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람직한 지도력 이양으로 보이는 예들은 모두 혈연에 기초하지 않았다.

세습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적법한 절차를 밟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삶의 수준은 법을 지키는 수준이 아님을 보았다. 법 자체가 권력의 이해 때문에 왜곡될 수 있으며, 법의 실행 또한 얼마든지 겉으로는 그 절차를 적법하게 보이게 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악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적법한 절차를 통해 나봇을 죽이고 그의 밭을 빼앗은 아합과 이세벨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했다. 세습에 대한 반대 이유 중에는 세습이 현재 한국 사회와 교회의 상황 속에서 상식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지적은 구약 윤리의 체계 안에서 얼마든지 토대를 가질 수 있는 주장임을 구약 윤리의 “자연법”적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을 확인했다.

부모의 담임목사직을 자녀가 이어받는 것이 어떤 상황, 어떤 시대, 어떤 맥락이든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범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와 사회의 상황은 그러한 일이 단순한 “자녀 청빙”이 아니라 “일정한 특권이 혈연적으로 계승”되는 “세습”임이 분명해 보이며, 그런 세습은 소극적으로는 구약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적극적으로 구약 성경이 반대하는 것이다. 교회 세습은 목회자가 왕의 자리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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