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은 성경적인가?”
“현대교회 세습은 성경적인가?”
이병삼 목사 /인천신일교회원로
서 론
기독교는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에 소망을 심어주었다. 이 기독교가 헬라로 넘어가 현대철학을, 기독교가 로마로 넘어가 조직과 권력을 낳았다. 기독교가 북 구라파로 가서 기독교 문화를, 기독교가 영국으로 넘어가 민주주의를, 기독교가 미국으로 넘어가 기업을, 기독교가 한국으로 와서 대기업 같은 교회를 낳았다.
한국 경제는 대기업과 작은 기업 간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와 같이 한국교회의 대교회와 시골 작은 교회 간의 격차도 하늘과 땅차이다. 한국 경제는 부자 세습이 문제가 되고, 철의 장막인 북한 정권의 삼대 세습 또한 문제가 심각하듯 한국 대교회의 세습 문제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첫째로, 기독교는 혈연의 종교가 아니라 언약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혈연관계가 목회적 승계 선택의 기준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는 물질물량주의도, 소유의식의 산물도 아닌 것이다. 소위 물량주의에 성공된 교회에서 세습이 문제이지 섬, 산간, 오지, 미자립 교회에 아버지 뜻을 완성키 위해, 자녀가 헌신키 위해 세습이 문제 되지 않는다. 교회는 자기 소유물이 아니다. 비록 자기 물질이라도 헌금하고 나면 하나님의 것이지 자기의 것이 아니다. 헌금으로 개척하여 큰 교회 됐다고 자기 소유가 아니다. 자기 소유로 착각하기에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로, 재벌총수 마저도, 스스로 경영권을 포기하고,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가는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자기 직계는 물론 사둔네 팔촌까지 요직에 맡기는 소위 낙하산 사원이 많은 기업가는 기업으로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인간적으로는 그 누구도 칭송하지 않는다.
넷째로, 오늘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은커녕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세습뿐만 아니라 여러 면으로 지탄과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는데 사회의 지탄과 원성의 대상된 교회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가?
제1장 목회세습의 긍정적인 측면(실행자들 변)
1) 큰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할 목회자는 큰 인물이어야 한다. 그간 큰 인물이기에 이런 큰 교회를 이루어 놓았다. 교회는 목회자의 영향이 대단히 크다. 그런데 전연 새로운 목회자를 세운다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다. 같은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하고 연마했어도 영성과 은사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목회자 모시기에 두려운 나머지 대안으로 큰 인물 밑에서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가족이 가장 이런 위험에서는 해결책이요, 계속 그 교회가 그 큰 인물 영향 하에 있기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2) 안정적인 목회를 위해서는 후임자가 전임자와 똑같은 목회 철학과 똑같은 스타일 설교 만이 지금까지 발전해 온 모드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다. 새 목회자가 새로 부임하면 적응 기간이 2~3년은 되어야 하는데 그간 교회는 퇴보되는 그런 위험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3) 적합한 절차에 의한 것이기에 아무 하자가 없다는 것이다. 나라마다 헌법이 있듯이 교단마다 교단 헌법이 있다. 그 헌법의 절차에 따라 전연 위법 사항이 없이 전 목회자를 대상으로 본 교회 후임 목회자 선정에 올려놓았으니 가족이나 친족이라고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목회 세습이 숱하게 시행되었으나 한국과 같이 전연 문제시 된 일 없고, 도리어 권장 상황중 하나이다. 영국 어느 교회에는 5대째 목회자 세습으로 이어온 교회가 있으나 도리어 자랑스런 칭송의 대상이지 한국 같이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세습을 지탄의 대상으로 삼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계가 문제인 것이다.
5) 그간 원로 목사들이 최선을 다해 큰 교회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일평생 일궈놓은 목장이다. 그런 원로 목사에게 위로와 보상 차원에서 세상 떠나실 때까지 우리교회에서 마음 편안히 모시겠다는 뜻에서 마음 편안히 해드리기 위해서는 그의 자녀에게 목장을 맡기면 그 보람과 평안으로 노후를 누리시지 않겠나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먼저 하고자 한다.
1) 큰 인물론 : 교회는 하나님이 세워, 하나님이 이루어 나가는 것이지 큰 인물에 의해서 교회가 이루어졌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바로 큰 인물 목사 교회이다. 교회는 우주보다 더 무변광대하고 그 목회 방향도 다양하다. 여러 목회자 밑에서 다양한 목회 철학과 다양한 설교 양식과 여러 목회 양식을 경험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한 가지 방법에 의한 목회 철학만 알고 자란 성도는 편식으로 올바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2) 새 목회자로 인한 리스크로 몸살을 앓는 기간이 있다. 아이는 아프면서 자란다. 교회는 평안하면 타락의 길로 가지 쉽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잘 극복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 위험 부담 때문에 세습을 한다는 괴변은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는가?”라는 속담도 모르는가?
3) 적법한 절차론 : 대교회는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담임 목사의 영향을 벗어나기 어렵다. 담임 목사의 의도대로 얼마든지 당회나 공동의회를 거쳐 완벽한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세습이 아닌 청빙이라고 포장 할 수 있다. 왕상21장에 나봇의 포도원을 욕심 낸 아합 왕에게 이세벨의 적법한 재판 절차를 그 당시는 완벽하고 합법적인 과정이었고,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용했다. 이러한 뒤에 숨어 조정하는 적법한 절차가 총회, 노회,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시행 될 수 있고 현세까지 시행되어 왔다.
4) 유럽이나 미국에선 세습이 아무 문제 되지 않는 다는 점.
유럽으로 넘어간 기독교는 철학, 조직, 문화, 민주주의 기업을 이루어 놓았다. 그들 속에서의 세습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기독교가 대기업을 낳았다. 대기업의 오만과 불법, 이북 정권이 가져온 삼대 세습과 독재 정권, 심지어 노동권까지 세습이 이루어지다보니 청년 일자리가 없다. 대졸 실업률이 세계에서 최고를 가져다준 원인이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심지어 소기업까지 더구나 노동계에서까지 낙하산과 세습 때문에 정당한 경쟁력이 상실 되 가고 있다. 이런 불미스런 파행을 앞장서 개혁해 나가고 선도할 교회마저 빠져들어 가니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5) 원로목사 예우 차원 : 물론 그 은혜 보답 운운하는 것, 참 좋은 미풍양속이다. 그러나 목사는 물러나면 본 교회와 일체 관계를 끊어야 하는 것이 목회 도리이다. 아무리 일평생 죽을 고생으로 이루어 놓은 목장이라고 해도 교회는 은혜 보답 차원에서 예우하려고 하나 목회자는 “이 무익한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다”라는 일념에서 교회에 ‘누’가 안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정신이요, 올바른 목회자 상이다. 예우 다 받고, 사랑 보상 다 받는 다면 하늘나라에 가면 아무 상이 없게 된다. 이미 이 땅에서 다 받아버렸기 때문이라고 성경에선 말하고 있다. 주의 종은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심지어 내 생명도 내 자녀도 내 것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를 소유물로 인식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온다. 세례요한처럼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함은 소리처럼 사라져야만 참 종의 모습이다. 청지기 사명을 올바로 깨닫고 첫 소명대로 목회 철학을 가진 목회자라면 달라야 한다. “내 무덤을 남기지 말라”는 칼빈은 참 종의 모습이다.
제2장 목회세습의 부정적인 측면
1) 구약적 측면에서 부정적인 면
① 구약에서 조차 혈연주위가 배격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시대에는 아론의 대제사장이 세습되었고, 다윗의 왕직도 세습되어 내려왔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의 혈족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죄되었고, 진정한 이스라엘은 표면적 보다 이면적 이스라엘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대제사장직 세습과 왕직 세습은 사실이나 이것은 역사적 서술일 뿐 현대교회도 꼭 이와 같이 하라는 명령은 없다. 구약의 역사적 서술이 신약시대 신앙생활의 규범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부인을 누이라고 한 것, 야곱이 아버지, 형을 속인 점, 유다가 며느리와 교제한 일) 우리도 이대로 하라는 것 아니다.
세습으로 인한 실패한 실례는 다윗(솔로몬), 솔로몬(르호보암), 웃시야(요람), 히스기야(므낫세), 요시야(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세습 안 해도 성공한 실례는 모세(여호수아), 엘리야(엘리사), 기드온, 사무엘, 다니엘, 요셉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다.
② 권위적 지배 구조에서도 부정적이다.
사사시대 13명의 사사들의 권위적 (왕적)인 면에서는 비록 구원자라고 했지만, 드보라, 기드온, 사무엘을 제외하고는 10명이 부정적이다. 자그만치 70명의 자녀를 둔 부도덕하고 수많은 처첩들 비위 맞추기 급급했을 것이며, 열왕기시대 42명의 왕 중, 북이스라엘 19명은 전부가 타락한 왕이었고, 나머지 중 다윗, 요아스, 웃시야, 히스기야, 요시야(5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긍정보다 부정적인 측면이 강해 보입니다. 왕 중 성공했다는 5명이 한결같이 왕권을 세습해서 그 자녀들이 가장 악한 모습들을 보인 왕들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 역사는 세습이 좋지 않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 역사 책이다.
2) 신약적 측면에서 부정적 인면
기독교는 중세 이전부터 봉건주의 사회 구성에도 일조를 했다. 종교개혁 이후부터 민주주의의 태동과 발전에 그 공로가 크다. 현대 산업화 사회에도 큰 공헌을 뒷받침 했다. 봉건주의로 회귀를 열망하던 때에 산업화로 대기업화된 교회가 봉건시대 하던 세습이 자연발생 적으로 태동된 것이다. 구약시대보다 신약시대에선 세습이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게 회자 되고 있어도 자기들 욕심을 굽히지 않는데서 생겨진 제도이다.
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옮겨 본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니 회개하라”고 외치셨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신 주님이지만 개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공교회를 치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두고 12제자와 70인 전도 대를 앞세워 교회를 세워나갔다. (큰 인물이란 1인이 대군중을 이끄는 현 교회와 대조 됨) 예수님은 혈연주의나 봉건적인 구약의 많은 제도도 가차 없이 책망과 개혁해 나가셨다. 막3:31-35에 그의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찾아와 문밖에서 기다린다고 하실 때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내 어머니”라고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부모나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어머니 마리아에게 요한을 소개했다. “어머니 아들이니이다” 요한에겐 “네 어머니니라” 예수님은 그의 남동생이 4명, 여동생들이 둘 이상인데도 그 동생 그 누구에게 어머니를 맡기시지 않으시고 사도요한에게 부탁하고 맡기셨다. 그래서 요한이 마리아 소천시까지 잘 모셨다는 전승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혈족주의를 완전배격하고 오직 믿음으로 형성된 신령한 가족관이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로부터 (예수님과 친척관계) 두 아들의 특별 배려를 부탁했다. 예수님은 아주 냉정히 거절한 것은 친척이기에 더 단호했다고 본다. “그 자리는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던지 그들이 얻을 것”(막10:40). 주의 사역자의 덕목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은 큰 교회는 큰 인물론 주장에 일격에 차단하며 말로는 예수님의 종이라고들 주장하나 주님이 원하시는 종의 모습과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예수님의 교훈 중 사복음서는 물론이고 신약 전 성경 어느 곳에서도 세습을 비호하시거나 옹호하신 발언이 전연 없다.
②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 생각해 본다.
바울은 많은 교회를 개척하셨다. 그도 인간인데도 목회 은퇴 이후 여러 교회로부터 연금이나 은퇴금, 노후를 부탁하고픈 그런 뜻이 전연 없었다.(은퇴 목사들은 이 대목을 묵상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가까우니 빨리 한 영혼이라도 구원시키는 것이 더 화급했고, 한 교회라도 더 많이 개척해 세우는 것이 바울의 소망이었다. 그래서 교회를 세워 어느 정도가 지나면 마땅한 일군에게 맡기고 미련 없이 떠나셨다. 그는 결혼을 안 해서, 욕심이 없어서 그랬는가는 몰라도 오직 신앙으로만 사시려고 노력함으로 복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 같은 믿음의 참 아들 된 디도,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에게 많은 사랑을 쏟았다. 개척하고 떠나면서 교회 뒷 일을 이들에게 맡겼다.
이용규 선교사의 책 “내려놓음”“더 내려놓음”“같이가심”. 목회자도 아닌 평신도의 신앙도 이렇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종이라는 목회자들의 형태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바울서신 13권 중에서 직분자의 자격, 직분 자가 갖추어야 할 사명에서도 바울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 중심이었다. 자기 개인이나, 자기 가정을 위한 구절은 단 한 구절도 없다. 교회 개척 후 사유화 하지도, 명예나 기득권 행사 한 것이 전연 보이지 않는다. 하늘나라에 계신 바울이 한국 교회 세습을 잘 했다고 칭찬해 주실 것 같지 않다.
③ 주의 직분자의 측면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다. 청지기, 종, 섬기는 자. 대속 물 같이 희생 헌신이 직분자의 사명인데 우리의 위치를 점검해 보라.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자가 과연 있을까? 더구나 세습된 목회자라면 이 말씀은 무거운 짐이 되리라고 본다. 바울도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직분 자들이 처음엔 진리로 사명으로,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점점 부요해 지면 육체 쪽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그래서 바울도 갈라디아교회에게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하였다. 야고보도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다. 직분자라고 무소유를 강요할 수는 없으나 욕심 때문에 죄에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 알면서도 빠져 들어가는 현실을 직시치 않으면 소망이 없다.
3) 조직신학적 측면에서
교회의 표징(marks)이라는 용어를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라 고백 한다.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확정 발표된 ‘니케아신조’에서 교회의 표징을 “우리는 또한 하나의(one) 거룩하고(holy) 보편적(catholic) 사도적인(apostolic) 교회를 믿는다”
① 교회는 하나이다.(엡4:4-6) 교회의 하나 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특징이다. 여기에 반해 세습은 개 교회 주의를 낳고 세습 시행으로 시험받아 분쟁과 분열을 야기 시킴으로 이 교회 하나 됨의 고백을 위반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 영혼은 누가 책임지며 하나 신앙의 위반이다.
② 교회는 거룩하다. 거룩의 근거는 성도의 도덕적인 우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 근거한다. 교회 세습은 교회 거룩성을 훼손한다. 교회의 목회 직이 세속적인 권력인 것처럼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원래 목회 직은 거룩한 교회를 섬기는 봉사 직이다. 직무에 이권과 권력이 개입되면 안 된다. 욕심을 품고서도 거룩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선자의 가증한 말이요 기도이다.
③ 교회는 보편적이다. 전 세계의 교회가 한 몸으로써 모든 신분, 연령에 구애 없이 전체성을 가져야 되고, 그리고 모두에게 보편적인 교회여야 공교회가 된다. 그러나 세습은 보편성 공공성을 훼손하고 사유화, 특정인에게 특혜를 주므로 완전 보편성이 무너지고 만다.
④ 교회는 사도적이다. 엡2:20 “너희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 교회가 사도직이란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에 기초를 두고 교회가 성장해야 된다. 세습은 사도 성을 훼손한다. 만인 제사장 론에서 보듯 설교를 특정 가문에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사도들이 세습한 사도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라.
4) 기독교 윤리학적인 측면에서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종교로(사교가 아닌) 승인으로 큰 변화가 왔다. 그 이전에는 “어떻게 순교할 것인가?”가 기독교적 윤리로 삼았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세속 사회에서 크리스챤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로 변화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 임박한 천국 소망에 윤리 기초를 둔다면 양심이 세습을 허락지 않을 것이다. 삶의 윤리 기초가 여기에 두지 않으므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부자로 중산층이라면 기독교 윤리 기초에서 벗어나게 살아온 산 증거이다. 올바른 크리스챤 윤리 하에 산다면 절대로 목회자는 부자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자 된 교회 역시 나눔과 봉사와 선교에 치중했다면 그 많은 부동산 소유와 대형교회가 될 수 없고 교회 본질에는 눈을 감고 재산 늘리는데 만 혈안 되었기에 잘못된 현상이다. 세습은 사유화, 소유화, 성직매매(simony) 재정이 투명치 못하고 몇몇 패당이 적당히 덮는 형식으로 교회가 어두워져 간 것이다. 거의 교회 행정이 목회자의 권력과 권위로 수행되고 있다. 기독교의 진정한 권력과 권위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경험한 영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칼빈도 사제직이란 그 누구에 의해 교황도 부모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도 대리인이나 후계자 없이 성직을 감당하셨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그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그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 예수님의 윤리관을 따라야 올바른 제자라고 본다. 세습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모습이나 자기를 죽어서라도 신앙개혁을 해 나가겠다는 모습은 전연 보이지 않는 데도 스스로는 개혁주의라고 자부하고 있다.
결론
세계 50代 교회 중 한국교회가 첫째로부터 25代까지 싹쓰리 했다. 각 교단의 세계의 제일 큰 교회는 어김없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다.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이요 영광스런 일이다. 그래서 한국의 위상에 경제적, 스포츠, 문화면에서 10위 안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큰 축복인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같은 큰 교회 뒷면에서 벌어지는 것 때문에 옥에 티가 되고 말았다. 기독교는 언제나 번영과 부하면 타락하기 쉽고 정치권과 손잡고 권력을 가져도 타락하기 쉽다. 대교회가 지닌 그 많은 번영과 재물 그리고 권력, 이 모든 것이 결국 불법과 탈법 양심도 신앙도 저버리는 타락의 길을 가지 쉽다.
본 세미나에서 세습의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을 어느 정도 파헤쳤다고 본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된다. 진리는 하나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진리 될 수 없고 이런 면에서는 이런 것이 좋고 저런 면에서는 저런 것이 좋다는 애매모호는 진리는 진리 될 수 없다.
예수님과 바울, 베드로 같은 목회 방식으로 대교회 됐다면 그 누가 토 달수가 없다. 그 이면 그늘 속에 숨긴 인본주의 적으로 불법 탈법으로 부흥 발전되어 대교회 됐다면 차라리 않된 것만 못하다. 긍정적이라고 주장하는 5가지도 긍정은 커녕 도리어 외적 모습과 속 모습이 전연 다른 것이 문제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신구약 성경이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음을 자세히 논했다고 본다. 그리고 예수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세습은 부정적임을 알 수 있는데 그 누가 아니라고 토를 달 수 있는가? 또한 조직신학적인 니케아신조에서 교회 표징 4가지 그리스도교 윤리학적 측면에서 부정적임을 증명했다.
본 세미나의 주제인 “교회 세습은 성경적인가?”라는 해답을 너무나 명약관화한 것이다. 한국 대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습은 성경적도 아니고 조직신학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신앙 양심적으로도 한마디로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한국의 내노라하는 교회들이 그간 세습으로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지역적으로는 서울과 인천 중심이었고 수도권으로 번저(부천, 분당, 성남, 광명) 나가고 지방으론 대구가 유일하다.
2) 총회장, 감독들이 대부분이며 한기총, 총회장 출신들도 다수이다. 진보 성향을 띤 감리교, 통합, 기장이 세습반대 헌법 제정 및 절대 반대 운동이 확산되나 보수주의라는 합동, 고신, 침례가 비진리인줄 알면서도 세습에는 관대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하므로 요즘 일어나는 세습은 보수측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3) 김선도(광림) 목사, 김홍도(금란) 목사, 김국도(임마누엘) 목사 친 삼형제 세습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4) 김창인(충현) 목사는 은퇴 후 이종윤 목사, 신성종 목사 같은 기라성 같은 목회자들을 6년씩 후임자로 담임했으나 결국 그의 아들(김성관 목사)을 늦게 신학을 시켜 세습하고 15년도 안되어서 교회가 큰 전투가 벌어져 죽기 전 양심선언으로 자기 목회상 최고의 실패는 아들에게 물려 준 세습이라고 고백했다. 기라성 같은 두 목회자, 심지어 아들과도 헤게머니 싸움으로 교회에 큰 분란을 일으킨 장본인은 김창인 원로 목사이다. 그가 세례 요한처럼 사라졌다면 충현교회는 세계적 대 교회가 됐을 것이다.(교회 분란의 중심에는 거의 원로목사의 전행 때문이 많다)
요즘 가장 심각한 문제점
1) 우리 교단이 아직 명단에 올라가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워낙 대교회가 없어서 그렇치 중소교회, 아주 소 교회에서까지 세습형태가 이루어지고 있다. 경인노회는 고신교단 36개 노회 중 중하위권에 속한다. 교회도 50교회가 못된다. 그런데도 벌써 4교회가 세습을 시행했다. ① 신도범/신용원(빛된교회) ② 박현환/정연규(석천교회, 사위) ③ 류재권/류주선(목민교회) ④ 조주환/조재욱(강변교회) 그리고 세습을 준비 중에 있는 교회(후보) 6-7명이나 된다. 얼마나 심각한가.
2) 각 교단, 각 노회 중,소 교회의 세습현황은 파악할 수조차 없이 부지기 수이다. 대형교회에서만 자행됐던 세습이 이젠 중 교회(300명), 소 교회(100명), 아주 소 교회(50-30명)에서점차로 세습이 자행되고 있는 현상이 심각한 문제이다. 왜 이런 현상이냐면 70-80년대 후반까지는 한 해 500교회씩 개척되었으나 90년대는 매년 3천-4천명의 목사들이 쏟아지는데 교회는 매년 500교회씩 감소하다보니 중, 소 개척교회 가릴 것 없이 교인 10가정이면 생활은 된다는 경제 논리를 앞세워 개척하지도, 시키지도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5만 교회 중에서 약 천교회 정도가 세습했는데도 심각성을 모르는지 숨겨 버릴려고 하는 보수주의 교단들은 각성해야 한다. 거기서 고신은 더 석고대죄 해야 한다.(개혁해야 될 것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개혁교회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요, 이미 개혁교회가 아닌 것이다. 개혁교회의 장자라고 자부하는 고신에게 울리는 큰 종소리이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